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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20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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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2023년 6월 20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시편 27,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시편 27,4)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코린토2서 8,1-9)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20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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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마태오 복음
5장 43-48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20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2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20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8

📌 강론시작 16:2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0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0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03

📌 미사시작 1:03:37

📌 강론시작 1:10:3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완전함으로 나아가기.

 

마지막(여섯 번째) 대당 명제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사랑에 관한 계명을 언급하면서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 전체를(5,21-48 참조)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풀이를 꿰뚫는 핵심이 바로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모든 이가 사랑의 실천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 명령은 어떤 면에서 가혹하게 들립니다. 정말 악의적이고 잔인한 행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백번 양보하여서 그 원수를 용서하는 일까지는 어떻게든 노력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과연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하여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결국은 다시 그 근거와 동기를 찾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오른뺨을 때린 자에게 왼뺨마저 내주는 것으로 모자라 그 원수를 사랑까지 하여야 하는 이유,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등을 돌리고 온갖 불의를 일삼는 자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시고 같은 사랑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편협한 사랑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자녀들의 사랑도 그러한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루카의 병행 구절은 이를 자비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곧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우리가 감히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완전함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과 가지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함에 가까워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삶은 죽음의 수용소가 아니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이 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웃을 일을 찾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매일 밤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주제는 ‘우리가 석방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날을 상상하며 배꼽 잡으며 웃었다고 하네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 결국 가스실로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다인 강제 수용소입니다. 말로만 듣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 보게 된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은 죽음만이 있고 어떤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유머를 통해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웃을 일이 없다고 단정 짓고 있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만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무시하고 그냥 그 힘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삶은 죽음의 수용소가 아닙니다. 특히 주님께서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안 좋은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희망의 주님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에 집중하고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 확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아마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사람만을 사랑하시지 않지요. 악인이나 선인,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따른다면 하느님처럼 우리도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악인에게 해를 비춰주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주님 사랑이 불공평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태 5,48 참조). 그래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를 죽음의 수용소가 아닌,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과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 나라도 가까워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려움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슬퍼하고 원망하며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길, 다시 사랑하고 감사하며 함께 헤쳐나가는 길. 나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 이화정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의지와 사랑의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타인의 구원까지 챙길 수도자라면 더더욱 자기 행복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미의 꽃을 보지 않고 가시만 보고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소리는 듣지 않고 욕하는 소리만 듣고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빛을 보지 않고서 세상이 어둡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행복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기에 무조건 행복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조건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원수에 의해 나의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고, 원수 때문에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한때 원수 때문에 불행했었습니다. 그래서 미워했고 불행을 곱씹을 때마다 더 미워졌으며, 더 미워하니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때 깨달았습니다. 원수 때문에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수 때문에 과거 불행한 것도 억울한데 미래까지 불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과거 불행 때문에 원수에 매였었는데 내 인생 미래까지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 다행인 것은 이때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원수에게 향했던 시선을 하느님 사랑에 향하게 되었습니다. 

원수와 미움의 지옥에서 하느님과 사랑의 천국으로 나의 시선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한 번에 바뀐 것이 아니라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었으며 행복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한 거였고 그래서 행복 의지는 사랑 의지가 되었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이웃이나 원수를 똑같이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목표로 세우고, 그런 사랑의 의지를 계속 북돋웠습니다. 

사랑의 의지는 강했지만, 사랑의 노력은 겸손했습니다. ‘목표는 높게, 시작은 낮게’ 입니다. 처음부터 큰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고 작은 원수부터 단계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은 언제나 힘들지만 계단을 단계적으로 오르면 반드시 오를 수 있습니다. 태양광처럼 하느님 사랑을 받아 오르면 지치지 않고 오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부터 믿기로 한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사랑과 원망 사이를 살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원한으로 기진맥진한 우리들 삶입니다. 더 아프게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원수의 세상이 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누굴 위한 삶인지를 묻게 됩니다. 우리자신과 하느님을 위한 삶입니다. 원한 때문에 더 나쁜 쪽으로 우리를 밀어넣고자 하는 거센 반항심을 하느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느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삶의 간섭이 아닌 극복으로 다시 태어나는 삶을 사랑으로 깨우쳐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는 기도와 노력의 삶을 응원하십니다. 삶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을 모르던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불가능이 아닌 가능의 벅찬 복음의 이름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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