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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18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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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하느님, 하느님께 바라는 모든 이에게 힘을 주시니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2023년 6월 18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1주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19,2-6ㄱ)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 제2독서
    (로마서 5,6-11)
    아드님의 죽음으로 화해하게 되었다면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9,36-10,8)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8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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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태오 복음
9장 36-10,8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6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8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현진 마르코 신부 집전

 

📌 속초 동명동성당 소개 00:22

📌 미사시작 01:32

📌 강론시작 16:2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8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37

📌 강론시작 16:2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8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32

📌 강론시작 14: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가 수고한 대가로 얻는 것일까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노력하고 애쓴 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당신 나라에 참여할 권한을 주신다고 우리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나약하던 시절, 곧 죄인이었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죄인은 하느님 앞에서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불경한 자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서도 착한 사람을 위하여서도 선뜻 내놓기 힘든 그 귀한 목숨을, 아무런 공로도 없는 죄인을 위하여 내놓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연민과 동정은 복음서 곳곳에서 당신의 구원 활동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합니다. 그분께서는 가엾은 마음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마태 14,14 참조), 더 많은 가르침을 주려 하시고(마르 6,34 참조), 그들의 배고픔까지 걱정하시어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십니다(마태 15,32 참조). 여기에는 혜택을 입게 된 이들의 어떠한 공로도 선행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아드님의 연민과 사랑이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여기서 ‘거저’로 옮긴 그리스 말 ‘도레안’은 선물을 뜻하는 ‘도레아’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는 보상이 아닌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이든 그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거저 받았다면 거저 줄 줄도 알아야 하고, 무상으로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보답이나 대가를 기대하는 선행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사랑과 친절로 수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인생을 사랑과 친절로 수놓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답을 내놓았습니다. 
 
“남에게 특별히 친절한 행동을 한 가지씩 하라. 당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상에 참여하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격려하라. 자기가 한 말을 성실하게 지켜라. 사람들이 베푸는 선물에 고마워하라.” 
 
어떻습니까? 그렇게 특별한 내용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대답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의 대답이었습니다. 인류가 가진 믿음과 철학을 토대로 탄생했던 중요한 종교, 철학 저작들을 동원해서 지혜와 통찰을 말하도록 만든 인공지능의 대답입니다. 

기계의 대답이어서 실망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세상의 지혜를 교육해서 한 말이라 관심이 생깁니다. 모든 지혜를 종합하면 특별한 무엇인가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혜는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당연히 행동하는 것이 지혜였으며,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줄여 나가는 것이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 주신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사랑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가엾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의 뜻은 ‘내장이 끊기는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라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간이 문드러지거나 새까맣게 타는 모양을 의미합니다. 몸속 장기는 감정과 기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지요. 기분 나쁠 때 음식을 먹으면 체하는 사람 있고, 신경이 예민해지면 대장이 과민해져서 설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한 두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는 것은 군중의 아픔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함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픔을 함께 할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 하십니다. 

이 일꾼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처럼,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성직자, 수도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모두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수확할 일꾼이 되어야 하는 우리가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닌, 나 자신부터 주님의 일꾼이 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은 사람으로 사람이 된다.

- 나쓰카리 이쿠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수확할 밭의 일꾼 많아지게 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하시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에게 기적의 힘을 주시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행복의 나라이고 사랑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소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잘 압니다. 저도 성소를 어렸을 때부터 느꼈음에도 계속 거부하다가 스물다섯에야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행복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확신하는 것이 결혼과 사제 성소 중 어떤 삶이 더 행복한 것일지 젊은이들이 제대로 분별할 줄 알면 성소가 매우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그랬고 수많은 젊은이가 사제로 사는 삶이 힘들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참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행복’이 아닌 ‘행복한 것’을 추구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것을 목표로 삼고 추구하면 행복은 부차적인 것,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수학 공부 시간을 반으로 하고 나머지 반은 나머지 과목을 공부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학을 암기로 공부하였습니다. 2학년 1학기 때 3학년까지의 수학책을 다 공부하고 그때부터는 문제집 풀이에 집중하였습니다. 3학년 1학기 때까지는 거의 모든 시험문제가 수학 문제집에서 나와서 객관식 한 개나 두 개 틀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2학기가 되니 응용문제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개념을 설명할 수 없으니 점점 성적이 떨어져서 학력고사 볼 때는 55점 만점에 18점을 맞았습니다. 객관식 아홉 개를 푸니 더는 풀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중학생까지는 수학 실력이 세계 최고입니다. 아무리 못하는 학생이라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엄청난 성적을 냅니다. 그 이유는 원리를 공부하지 않고 무작정 외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수학을 좋아하게 만들지 않고 대학 들어가는 수단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수학이 제일 싫습니다.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수단이었지 수학 자체의 맛은 몰랐습니다. 문제집을 외우는 게 아닌 한 문제를 풀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풀어내는 기쁨을 누리는 공부가 되었더라면 지금도 수학 실력이 발전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낳습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 때 찾아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이 행복입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며 사랑이 행복의 목적이 아닌, 예쁜 여자와 결혼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행복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되면 행복하고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만 가진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저는 스물다섯이나 되어서야 지금까지 행복이 아닌 행복한 것을 추구하며 행복을 포기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 행복임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면 정말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가 되는 기쁨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람 영혼을 구원하는 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기 아들들에게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아버지가 책임질게!”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제대로 알려준 것입니다. 성소가 줄어듦은 우리가 디팩 쵸프라와 같은 스승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 성소자들이 부정적인 마음에 물들지 않도록 “행복하여라!”하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따르는 아이들로 키우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 행복의 길을 알면 하느님 일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것만큼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시달리고 기가 꺾인 이들의

 

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많은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으시는 겁니다. 

왜 뽑으셨고 왜 열둘을 뽑으셨을까요? 

열둘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의 전후 맥락을 보면 열두 사도를 뽑는 더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안타까움을 표하시는데 그 안타까움이 대단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안타까움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양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습니다. 그리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누구에게 시달리고 왜 기가 꺾여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참고하면 강도들에게 시달리고, 불충한 집사들에게 시달립니다. 

강도들은 그저 양들을 팔아먹고 잡아먹으려만 든다고, 불충한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술이나 먹고 종들을 학대한다고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강도들이란 세상 권력자들과 악덕 기업가들일 수도 있고, 불충한 집사란 우리 공동체의 책임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양처럼 순하고 힘없는 군중이 시달리는 것도 안타깝지만 오늘 주님의 더 큰 안타까움은 그런 양들을 지켜주고 종들에게 먹을 것을 줄 목자와 집사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양들이 기가 꺾인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달려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있다면 기가 꺾이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안타깝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시며 열두 사도를 착한 목자와 충실한 집사로 뽑아 세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양들이기도 하고 목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이기도 하고 집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종들이고 양들이며 주님의 집사이고 목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집사로 부르시고 주님의 목자로 뽑으신다면 어떻게 응답하실 겁니까? 

순종하시겠습니까? 불순종하시겠습니까? 

순종은 하지만 억지춘향입니까? 기꺼이 응답하실 겁니까? 

영예롭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부담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자를 고쳐 주게 하시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영예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그럴 힘이 없고 그래서 부담스럽지만 신앙적으로는 영예로 생각하고 주님의 힘이 입어 그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가고 나중에 이방인들에게도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밖으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기 전에 안에서부터 그러니까 나부터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부터 돌봐야겠습니다. 

세상의 복음화 전에 나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복음화를 하고, 밖의 병자와 허약한 이를 치유하기 전에 안에서부터 치유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더 좋은 삶을 위한 삶의 일꾼들이 있습니다. 수확의 때가 일꾼들의 가장 좋은 때입니다. 씨를 뿌리신 주님께서 수확할 밭의 일꾼들을 부르십니다. 모든 수확은 가장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일꾼들을 믿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기도가 일꾼다운 일꾼을 만듭니다. 기도를 먹고 사는 일꾼들입니다. 

기도가 이루어내는 수확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을 일꾼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좋은 일꾼들을 통해 알게되는 좋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모으시고 고르시고 만드시는 일꾼들의 주님이십니다. 일꾼들과 주님은 삶이라는 수확할 밭에서 하나가 됩니다. 

일꾼들은 기도와 실천으로 세상을 읽습니다. 서로의 길이 가장 좋은 선물이며 생명입니다. 최고의 선물인 기도로 가장 좋은 것을 수확하는 일꾼들의 행복입니다. 일꾼들이 행복하면 주님께서도 행복합니다. 일꾼들의 탄생은 신앙공동체의 가장 좋은 기쁨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좋은 일꾼들이 많아지길 기도드리는 행복한 주일입니다. 행위(行爲)가 만들어내는 일꾼들의 정체성입니다. 주님의 일과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주님의 일꾼들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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