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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16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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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지네.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시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2023년 6월 16일 (금)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6)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7,6-11)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 제2독서
    (요한1서 4,7-16)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1,25-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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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오 복음
11장 25-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6일 (금)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예수성심대축일 소개 00:05

📌 미사시작 01:45

📌 강론시작 12: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6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20

📌 강론시작 17:5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6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6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날입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의 바탕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지니신 한없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자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어(창세 1,26-27 참조) 그 사랑의 충만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애틋한 마음은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맺으시는 계약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제1독서 참조).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과 맺은 계약에 불충실한 모습을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품으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십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 배반을 바로잡아 주리라”(예레 3,22).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아드님의 파견으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제2독서는 하느님을 사랑이신 분으로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요한 1,14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며 연민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의 자애로운 마음을 꼭 닮은 아드님의 성심을 공경하는 오늘, 우리는 특별히 사제들이 성화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아, 각자의 소임지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따뜻한 위로와 안식을 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마음 모아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이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앞으로 뻗어서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을 손의 감각으로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상시에 보던 것처럼 잘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 9장). 그곳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선천적 백내장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수술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앞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형태만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공간 능력 파악을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씩 보이는 수준을 뛰어넘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주실까를 고민하십니다. 
 
문제는 늘 우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분인데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에 큰 희망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벽돌이다.

- 롱펠로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군가의 마음을 품는 방법은?

 

이번 달은 예수 성심 성월이고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청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기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닐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서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라고 하며, 그분이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실 수 있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누군가의 마음을 품는 방법은 그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9-11)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품으면 당신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당신 마음을 품으면 그 마음이 원하는 뜻을 순종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이 느끼는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리란 뜻입니다. 

요즘 콜롬비아 아마존 밀림에서 무사히 구조된 4남매가 연일 화제입니다. 조금씩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배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0일간의 기적은 장녀 열세 살 레슬리의 생존본능 덕분이었습니다. 사고 이후 나흘 동안 생존해있던 네 남매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꼭 살아남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맏이인 레슬리는 나뭇가지를 모아 머리 끈으로 묶어 임시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레슬리는 추락한 비행기에서 3kg 정도의 카사바 가루를 찾아 동생들을 챙겼습니다. 카사바는 고구마처럼 생긴 뿌리 식물인데요. 탄수화물이 풍부하여서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이었죠. 카사바가 떨어지자 네 남매는 주변의 씨앗과 나무 열매를 구해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리 물과 식량이 있다 하더라도, 재규어 등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리는 아마존 밀림에서 13살 레슬리는 어떻게 9살과 4살, 그리고 11개월 된 동생들을 챙길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은 남미 원주민 후이토토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원주민식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냥과 낚시, 열매 채집 등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며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생존게임’을 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영국의 열대림 생태학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원주민 아이들은 일찍이 임시 거처를 짓는 방법을 배우고, 아마존에 서식하는 독사를 구분할 줄 안다며 또래의 서양 어린이들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구조팀의 작전명은 에스페란사, 스페인어로 ‘희망’이었는데요,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틴 열세 살 맏이 레슬리의 기지가 죽음의 정글에서 어린 동생들을 지켜냈습니다. 기적을 보여주며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4남매의 사연은, 경제난과 범죄 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콜롬비아는 물론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장녀 레슬리는 살아남아야 했고 동생들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때문에 해야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마음을 장착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도 어리광 부릴 나이이지만 어머니로서 동생들을 보살폈습니다. 어머니 마음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뒤에는 어떤 영광을 얻습니까? 어머니가 자녀를 잘 키워내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누립니다.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브루클린의 가난한 동네에서 택시와 트럭, 공장 노동자로 가정을 부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직장에서 다치자 가족은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건강 보험이나 산재 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상은 가족에게 절망적이었습니다. 

슐츠가 아버지의 부상과 실직으로 얻은 교훈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고객은 두 번째입니다. 직원이 첫 번째입니다.” 투자자들이 직원들의 보험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스타벅스를 아버지가 일하고 싶어 했을 만한 회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경영 첫 번째 마인드는 직원의 건강과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타벅스 직원들을 자녀로 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느꼈을 만한 아버지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음은 뜻과 감정의 결합입니다. 뜻을 장착하면 감정도 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온유하고 겸손해지라는 계명은 어느 종교나 어느 부모의 가르침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안식을 영광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특별히 사제는 그래서 사제직을 주님께서 불러주셨고 주님께서 파견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마음은.

 

우리는 거의 모두 남이 내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옹졸한데도 그 옹졸한 맘에 들기를 남에게 바랍니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데도 그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거의 모두 내 맘에 들지 않고 그래서 미워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에 생기는 것이지 반대로 내가 네 맘에 들려고 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그 작은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이 맘에 들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안에 미움이나 불만이나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백이면 백 다 바라는 마음 곧 욕심 때문이고, 내 마음이 바다같이 넓지 않고 옹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심을 바다에 비겨 성찰하고자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라고 하였지요.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상선입니다.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깨닫고 맛보게 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으신 하느님은 물과 같기에 가장 낮은 사람이 그분을 깨닫고 맛보게 되지요. 물은 거슬러 흐르지 않고 아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낮고 겸손한 사람에게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다야말로 가장 낮고 그래서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흐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크고 넓으며 가장 크고 넓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는 겸손이 바다이고 겸손한 마음이 바다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신을 가장 낮추지만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사랑도 가장 많이 수용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하시며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시고, 그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성심은 겸손하고 온유하여 바다와 같이 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런데도 마음이 부대끼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이유는 마음의 안식 때문이 아닙니다. 앞서 봤듯이 바다와 같이 낮고 넓은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심에게서 배우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도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 곧 Passio입니다.

수난의 사랑이란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삼으시는 사랑이며, 그 마음이 어떤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굳이 인간의 것과 비교한다면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언젠가 고백성사를 주는데 한 분이 성사를 보시며 당신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통곡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무슨 죽을죄를 지으셨냐고 여쭈니 이혼하셨다는 거였고, 그래서 연세가 있으신데 어찌 이혼하셨냐고 또 여쭈니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이혼한 죄가 당신의 죄라고 생각하시는 거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은 아들의 죄를 당신의 죄로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심을 닮고 이런 어미의 사랑을 닮는다면 죄를 지었다고 그저 형제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형제의 죄로 마음이 상처받았다고 징징대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형제의 죄를 마음 아파하고 그 죗값을 대신 치르려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돌아봅니다. 상처를 줘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수준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형제를 맹비난하지는 않고 조금 마음 아파하는 수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심장 박동소리 만큼 뜨거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매일매일 당신의 사랑을 먹이며 마음을 키우십니다. 우리의 심장을 깨우는 예수 성심이 있습니다. 살과 피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됩니다. 

심장의 울림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예수 성심이 바로 삶의 중심이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맛본 사람은 예수님 심장을 이미 맛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맛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사랑의 길을 걸어갑니다. 

심장으로 사람이 되어갑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 성심이십니다. 예수 성심에서 복음말씀이 선포됩니다. 마음에서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 성심에서 사제들이 성화됩니다. 아름답고 맑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성심에서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살리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제의 삶을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십니다. 심장과 함께하는 살아있는 삶입니다. 피를 돌게 하듯 우리를 살게 하시는 예수 성심께 우리의 삶을 봉헌합니다. 

심장의 화음이 공동체의 화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쁨으로 안아주시는 예수 성심이 계십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깨우십니다. 성심의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며 차오르는 마음의 시간입니다. 

마음에서 다시 사제의 길을 찾는 시간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예수 성심을 닮게 하소서. 절실한 마음으로 봉헌하는 이 거룩한 미사성제 안에서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만나는 뜨거운 사랑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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