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 이름으로 저를 구하시고, 당신 권능으로 제 자유를 찾아 주소서. 하느님, 제 기도를 들으시고 제 입이 아뢰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이 제사로 도와주시니 저희가 구원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여 그 은혜를 새로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2023년 3월 24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 7,29)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지혜서 2,1ㄱ.12-22)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오늘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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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복음
요한 7장 1-2.10.25-30절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24일 (금)
서웅 마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24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7
📌 강론시작 17:1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4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7
📌 강론시작 07:2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4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32
📌 미사시작 1:03:43
📌 강론시작 1:12:02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그래도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의인을 대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에서 봅니다. 그들은 다짐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이 말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갈등을 연상시킵니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서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의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2)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마치 악인들이 놓은 덫과도 같고 그들의 생각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태도는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부 유다인들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지금 2만 원을 받는 것과 한 달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보십시오. 아마 지금 당장 받을 2만 원을 선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달이나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은 액수라도 지금 당장 받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교는 어떨까요? 1년 뒤에 2만 원과 13개월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3만 원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1년이나 1년 하고 한 달 더 기다리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 더 기다리면 1만 원이 더 생긴다고 하니, 이를 선택합니다.
이 두 상황은 똑같이 만 원과 1개월이라는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상황에서 지금 당장 받는 2만 원을 선택했다면, 두 번째 상황에서도 1년 뒤의 2만 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합니다. 지금의 한 달은 미래의 한 달보다 훨씬 더 큰 차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다른 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리는 시간과 남이 누리는 시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시간을 맞이하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사랑의 실천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죽이는 시간이 아닌, 살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는 시간이 아닌, 주님 뜻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뒤로 미룰 시간은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시간뿐입니다. 후회와 좌절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기보다 오로지 지금 주님 사랑에 집중하고 실천해야 할 시간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다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다면서 예수님을 공공의 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그분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집중했다면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려고 하고 있으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으니, 사람을 살리는 시간이 아닌 죽이는 시간을 만들어갑니다. 이런 시간 안에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사람을 살리는 시간인지 아니면 죽이는 시간인가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 자기 뜻만 펼치는 시간인가요? 아니면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 뜻을 펼치는 시간인가요? 주님 뜻을 펼치는 사람만이 어떤 순간에서도 함께하는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이란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지 않을까?
- 요슈타인 가이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알면서도 모르는 약
주님께서 죽임을 당할 때가 점점 다가옴을 복음은 얘기하고, 독서는 주님께서 왜 죽임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얘기합니다.
죽임당하는 이유가 주님께 전혀 있지 않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있음을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데 주님께서 그들의 죄와 악을 들춰내시기 때문이고, 그들의 죄악을 들춰내시는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알면서도 자기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서 죽이는 정말 나쁜 자들과 자기의 죄악을 들춰내는 사람이 주님인 줄 모르고 죽이는 보통 사람들.
정말 나쁜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 옆에 있으면 자기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사람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자기 옆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싫어하는 것이, 곧 어둠이라고 요한복음이 얘기하듯 악인은 선인을 싫어하기 마련이고, 선인을 싫어하고 죽이는 자가 곧 악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악인이고 그가 선인임을 알고도 선인을 악인으로 몰아서 죽입니다.
그런데 선인을 죽이는 사람도 악인인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죽이는 자들은 얼마나 악한 자들입니까? 그런데 이 정도로 악하지 않지만, 보통의 우리도 악한 구석이 있고,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에게도 악한 구석이 어느 정도 다 있습니다.
나의 죄와 악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악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자기가 죄인이고 악인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자기의 죄와 악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인 것을 몰라 보고 그를 악인이라고 하는 죄와 악입니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그래도, 자기가 죄와 악을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죄악을 드러나게 한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회개할 것이고, 이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 지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주님이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온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은 모르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주님께서는 그들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세상 것은 알지만, 천상 것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이런 악이 있음을 오늘 인정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우리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보편적이며 영원합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의 간절한 가르침이 울려퍼집니다. 살이 되고 영혼이 되는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십니다. 현실의 문제들을 보편적인 당신의 가르침으로 돌파하십니다. 이와 같이 선행되어야 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겨눈 칼날이 번뜩일수록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가르침은 더더욱 강렬합니다. 거세어지는 비판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얼버무리지 않고 스스로를 설명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는 통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이심을 역설하십니다.
논쟁 속에 가두어 둘 수 없는 하느님의 진리 육화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우리의 상황을 바로볼 수 있다면 깨어있는 정신이 될 것입니다. 흩어진 마음을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되잡는 사순입니다.
가르침은 믿음과 실천으로 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우리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주시는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우리 생활 안에서 더욱 깊어지는 예수님의 간절하신 가르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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