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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05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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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5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하바 1,2-3; 2,2-4)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 제 2독서
    (2티모 1,6-8.13-14)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7,5-10)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하바 1,2-3; 2,2-4
오늘 제1독서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2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 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3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2,2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환시를 기록하여라. 누구나 막힘없이 읽어 갈 수 있도록 판에다 분명하게 써라.” 

3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2티모 1,6-8.13-14
오늘 제2독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7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1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14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7,5-10
오늘 복음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그때에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4일
최성훈 바오로 신부

 

✚ 행당동성당 소개 00:20

✚ 미사시작 01:18

✚ 강론시작 15:4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과연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요?

백화점에 가면 이른바 명품이라고 하는 비싼 물건이 많습니다. 어떤 것은 웬만한 월급쟁이의 일 년치 연봉과 맞먹는 가격입니다. 그래서인지 촌놈인 저는 백화점에 가면 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십여 년 전, 새로 생긴 백화점으로 구경을 나섰습니다. 돌아다니다 한 명품 매장 옆을 지나갔는데 가격표를 보고 ‘음, 이 정도구나.’ 생각하다가 다시 눈이 커졌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숫자 끝에 ‘0’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화점의 명품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엇갈렸습니다. 그러면서 비싼 물건을 사는 것에 대한 논쟁보다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기서 가지고 싶은 것을 공짜로 줄 테니 하나만 골라 보라고 하면 무엇을 고를까?’ 다른 중요한 것도 많겠지만, 이왕이면 값비싼 명품을 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온갖 상품으로 가득 차 휘황찬란한 백화점은 도심 한복판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백화점입니다. 거기에는 슬픈 마음, 우울한 마음, 괴로운 마음도 있고, 욕심, 화, 어리석음도 있고, 행복한 마음,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을 골라야 할까요? 백화점에서 명품을 고르듯이 우리 마음속에서도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골라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의 백화점에서 돈은 내지 않아도 되지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온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아주 크지 않아도,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디작아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분의 마음에서 가장 귀한 것을 고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눈, 관상의 눈을 챙겨야!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바로 드는 생각은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이 내외적으로 매우 혼란하고 뒤숭숭하여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이 세상이 어떻게 될지 걱정만 가득합니다. 밖이 소란스러우니 안도 소란스러운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저도 같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신앙인이요 수도자인 저마저 이러면 되겠는가 생각되며 정신이 퍼뜩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을 넋 놓고 볼 것이 아니라 나를 봐야 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봐야 신앙인답다 할 것입니다.  

시선을 뺏기지 않고 곧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내 시선을 내가 챙겨 봐야 할 것을 봐야 신앙인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인의 눈 곧 관상의 눈이요 믿음의 눈을 챙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세상을 뒤흔드는 트럼프나 푸틴이나 시진핑이나 이런 자들에게 눈을 뺏기고 마음이 혼란으로 가득 차면 안 됩니다. 이런 자들이 아무리 커 보이고 세상을 흔들어도 하느님이 더 크십니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고 파도가 집채같아도 바다가 더 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적이 있지요. 제자들이 호수를 건널 때 주님께서는 부러 제자들만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엄청난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때야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뭔 생각인지 물 위를 건너오라고 말씀해 달라고 베드로 사도는 청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에게 물 위를 건너오라고 하셨고 그 말씀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건너가고 있었는데 주님만 보고 갔을 때는 잘 건너가던 그가 거센 풍랑을 보자 그만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법입니다. 풍랑을 보면 풍랑에 빠지고, 주님을 보면 풍랑을 밟고 갑니다. 오늘 하바꾹 예언자는 돌아가는 세상을 한탄하며 주님께 투덜거립니다.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당신께서 구해주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폭력이다!’ 하고 소리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이에 주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늦어지는 듯 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이것을 믿어야 하고 복음의 제자들은 믿음을 주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에 주님께서는 믿음만 있으면 안 될 것이 없다고 격려하십니다.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게다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보면 곧 관상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생길 것이고, 그 믿음으로 마음만 먹으면 어떤 어려움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지러운 세상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면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말고 주님을 관상하면서 제자들처럼 주님께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청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진정한 믿음은 겸손에 있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여물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에 대한 예언자 하바쿡의 하소연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곧 정해진 때는 늦어지는 듯해도 오고야 말 것이니,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말합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1,4) 

여기서 ‘성실함’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성실함, 확고함, 믿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바꾹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로마 1,17)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곧 ‘믿음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2티모 1,14)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믿음을 더해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꾸짖고 질책 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왜 그러실까요? 제자들이 더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왜 제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책을 하실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이 청원의 배경에는 그들의 그릇된 ‘믿음에 대한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들은 믿음을 마치 규모나 양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 크고 더 많은 것으로 더하여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 ‘진정한 믿음’인지를 보십니다. 곧 ‘믿음의 질적인 확실성과 순수성’을 보십니다. 그래서 비록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순수하고 확고하면 그 믿음의 권능이 드러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믿음’을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믿는 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은 전능함이요 불신은 무능임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이 나았을 때에도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8,48)라고 하시고, 예리고의 눈먼 이의 치유 장면에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고 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 없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제자들의 이 간청에는 그들이 이미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닌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보라. 사실, 너희에게는 믿음이 없다. 만약에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돌무화나무를 한마디 말로 옮겨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믿음이 이미 있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 크냐 작으냐 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믿음이 올바른지’ 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에 비유하여 겸손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종이 주인의 분부대로 다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듯이, 제자들이 당신의 분부를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다 수행했다고 해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겸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늘 그분 앞에서 겸손합니다. 겸손한 섬김은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5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진정으로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지켜주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만이 줄 수 있는 해답 :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정한 성공을 좇아 죽도록 열심히 살았는데도, 막상 정상에 서 보면 '이게 전부인가?' 하는 공허함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과 명예, 명성을 다 거머쥐었지만 결국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해답 없이는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인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며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명배우였습니다. 누구보다 밝고 유쾌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극심한 우울증과 존재론적인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는 20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코미디에 대해 "나는 웃음으로 자신을 숨긴다. 웃음은 때로 당신의 유일한 방어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고백은 "나는 항상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해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그가 찾지 못한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우리의 존재가 흔들리고, 모든 행위는 결국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사춘기 시절, 거울 속의 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수없이 물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해답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통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주신 '단팥빵과 흰 우유', 아버지의 투박한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을 보며, 저는 의심 없이 확신했습니다. '아, 저분들이 내 부모님이 맞구나. 나를 위해 저렇게 애쓰시는 분들이구나.' 그 양식을 먹고 굳은살을 묵상하며, 저는 제가 부모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믿음은 저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곧, 나의 창조자가 누구이시고,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하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와 '쓸모없는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하고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깊은 본질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주인)이 누구이신지 알고, 나(종)는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묵상'을 통해 자라납니다. 우리가 그 양식을 먹고 묵상하며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즉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세상의 왕이자 주님이라고 착각하며, 그 끝에는 허무만이 남을 뿐입니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모델인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통찰력(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과 불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 재능을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부터 조종사, 의사, 변호사 등으로 위장하여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주인으로 착각했고,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보다 욕망과 생존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성공과 쾌락을 경험했지만, 그의 내면은 늘 깊은 공허함에 시달렸고, 결국 FBI에 체포됩니다. 그는 체포된 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자신이 받은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양식'을 먹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세상의 왕이자 주인으로 착각했기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 못하고 허무의 굴레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사랑(양식)을 알고,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주인의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얻어냅니다. 이들은 믿음의 본질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늙은 소를 보십시오. 최노인과 함께 40년을 넘게 일한 이 소는, 늙고 병들었지만 주인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주인이 주는 양식을 먹으며 주인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합니다. 이 소에게 최노인은 무엇이든 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 늙은 소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았기에, 그 존재 자체가 행복했고, 주인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예는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나를 아는 믿음'이 가져오는 행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같은 아버지의 양식을 먹고 자란 두 아들, 하지만 그들은 확연히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양식(유산)을 가지고 떠나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묵상했고,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 여기며 아버지의 자비에 매달렸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는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깨달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을 통해 믿음의 완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양식을 매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동생을 미워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만을 바랐습니다. 그는 양식에 대한 묵상이 없었기에,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했고, 아버지를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이 없었기에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분노와 시기심 속에서 허무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저절로 증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분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그분이 주는 양식에 우리의 깊은 묵상이 더해질 때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을 알아가면, 그분은 더 커지시고 나는 더 작아집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쓸모없는 종'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되고,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송아지라도 잡아서 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막연히 구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더 알게 하소서. 이를 위해 매일의 양식을 주소서. 이 양식에 대한 저의 깊은 묵상을 더하게 하소서. 이를 통해 당신의 위대함을 매일 더 알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 저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매일매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더할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라 고백하며 겸손하게 그분께 의탁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더라도 산을 옮기고 바다에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기적을 이루는 위대한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찾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과연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1) 아~~ 내 인생은 참 의미 있었어. 

2) 아~~ 내 인생은 참 허무했어.
 
첫 번째의 대답은 새로운 삶으로 넘어감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답은 후회, 걱정,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삶을 점수로 매긴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 점수에 따라 자기 마지막 순간의 말도 결정될 것입니다. 
 
100점 만점에 90점(약간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만족), 50점(허무), 20점(매우 허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100점짜리 삶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알아야 잘 살았는지 또 반대로 부족한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0점 삶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하기 좋게 객관식으로 제시하겠습니다. 
 
1) 돈 많이 버는 것. 

2)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

3) 무조건 건강한 삶. 

4) 보람과 의미 있는 삶.
 
100점 삶이 우선 무엇인지 알아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100점짜리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려 하지 않고, 순간의 만족이 마치 100점 삶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로 그 믿음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종의 비유를 통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겸손한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이로써 참된 믿음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함께, 형제가 죄를 짓더라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자기들 믿음의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음의 양보다 질이 중요함을 겨자씨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작은 씨앗이 겨자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거대할 필요가 없고,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더라도 살아 있고 참된 믿음이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종의 비유에서 나오는 종처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하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람과 의미 있는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이 있는 삶입니다.

 

오늘의 명언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그 동굴에 당신이 찾는 보물이 있다(조셉 캠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작은 기쁨과 소중한 만남을 느끼는 믿음의 새날입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분명 기도입니다. 믿음은 기도와 함께 자라납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용기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며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은총이 바로 믿음입니다. 끝내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삶의 매 순간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며 고통을 의미로 바꾸는 힘입니다.

믿음은 성숙을 낳고, 성숙은 믿음을 깊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영혼의 여정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하는 내어맡김의 주일 되십시오. 믿음은 기도로 살아나고 자라납니다.

 

 

 

티모테오2서 1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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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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