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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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바룩 4,5-12.27-29)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 오늘 복음
(루카 10,17-24)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바룩 4,5-12.27-29
오늘 제1독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5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내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6 너희가 이민족들에게 팔린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너희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하였기에 원수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7 사실 너희는,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제사를 바쳐 너희를 만드신 분을 분노하시게 하였다.
8 너희는 너희를 길러 주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너희를 키워 준 예루살렘을 슬프게 하였다.
9 예루살렘은 너희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들어라, 시온의 이웃들아!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 슬픔을 내리셨다.
10 나는 영원하신 분께서 내 아들딸들에게 지우신 포로살이를 보았다.
11 나는 그들을 기쁨으로 키웠건만 슬픔과 눈물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12 과부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나를 두고 아무도 기뻐하지 말아 다오. 나는 내 자식들의 죄 때문에 황폐해졌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멀리하였다.
27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이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를 기억해 주시리라.
28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29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루카 10,17-24
오늘 복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4일
김학수 바오로 신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소개 00:06
✚ 10월 교황님 기도지향 01:49
✚ 미사시작 02:05
✚ 강론시작 08:5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시던 그날은 새로움과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새로 선출되신 교황님께서 정하신 교황명은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교황명이었습니다. 이어서 등장하신 모습도 참신하였습니다. 교황이면 으레 입는 붉은색 모제타도 쓰시지 않고, 가슴 십자가도 추기경 때 하시던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목에 거시고 군중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와 전 세계에’(Urbi et Orbi) 보내는 첫 강복을 하시기 전에 그곳에 모인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시며 침묵 가운데 먼저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청 사도궁이 아닌 교황청을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지내셨고, 외국을 순방하실 때도 당신 가방을 손수 들고 다니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살아가시려는 모습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라고 기도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께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느님이 필요하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은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기에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알고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믿는 이는 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그러하셨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신앙인인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프란치스코처럼 프란치스코와 함께
올해도 프란치스코의 대축일을 맞는 저는 그저 담담합니다. 2023년부터 다중 의미의 800주년을 연속으로 지내고 있고 올해는 ‘피조물의 노래 800주년’을 지내고 있으며 그래서 저로서는 오랜 염원인 태양의 찬가를 마침내 작곡했는데도 담담하다니 이래도 되는 것인지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이내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죄송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담담하고 당당합니까? 프란치스코는 이제 이미 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모셔 들여야 할 손님이 아니라 이미 제 안방에 자리하고 계신 분이며,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내내 찾아뵙지도 전화도 드리지 않다가 생일에야 겨우 잔치해드리듯 그렇게 대축일 하루만 프란치스코를 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 무의식 안에 프란치스코는 녹아있고, 저의 성격과 인격과 신앙의 한 부분을 아니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초심자였던 어릴 때처럼 프란치스코를 알고자 들지도, 알고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거나 아는 만큼 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살아지는 만큼 살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올해는 피조물의 노래 800주년이니 피조물과 프란치스코를 조금 생각해보겠습니다. 올해 저는 제가 영적 보조자로 있는 재속프란치스코형제회에서 동식물 축복식을 하려고 하는데 아마 많은 분이 축복받으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동물과 식물을 축복하면서 실은 축복을 청하는 분들도 축복하려고 하고 그분들을 오히려 더 축복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피조물을 대하고 사랑하게 해주십사고 말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사랑해야 동식물도 행복하고 사람도 행복하니 말입니다.
요즘 동식물을 사랑하는 분들이 프란치스코처럼 사랑하는지 의문입니다. 동식물 안에서 그리고 동식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느냐 그 점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동물과 식물을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고, 그런 까닭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까요?
동물과 나 사이에 하느님도 안 계시고, 동물과 나의 사랑에 빠져 사람 사랑이 빠진 것은 아닐까요? 프란치스코에게 동물과 식물은 하느님 사랑의 창조물이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신 선물이요 동반자이고, 밟고 하느님께 올라가도록 주신 사다리요 통로입니다.
둘째는 동물과 식물에게 얼마나 자유를 주냐 그 점입니다. 왜냐면 자유를 주는 만큼 진정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부터 수석이나 분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돌들과 나무들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주춧돌을 보면 집을 지탱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까 불쌍했는데, 들에 강에 있어야 좋을 돌을 집에 가져와 내 마음에 들게 갈고 깎으며, 산에 있어야 제대로 클 나무를 작은 화분에 심어 다 크지 못하게 하고, 모양도 철사로 감아서 내 입맛대로 만드니 불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이나 나무도 그런데 그런 식으로 키우는 동물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산으로 들로 맘껏 뛰어다니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 사는 것이 불쌍하고, 예쁘게 한다면서 인간 맘대로 이걸 입히고 저리 꾸미는 것이 불쌍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동물이 자기에게 왔을 때 길들이지 않고 축복한 다음 다 풀어놓아 주었으며, 특히 새들이 맘껏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반려동물을 아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 또 아프고 외로운 노인에게 반려동물은 필요하고 또 그들에게 반려동물은 소유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는 제가 반려자가 되지 못하고 동물들이 저 대신 반려자가 된 것 같아 미안하고 반려동물들에게도 저는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해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내 소유가 아니며, 그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가게 되는 고마운 사다리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프란치스코처럼 그리고 프란치스코와 함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선하신 뜻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 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또한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21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서 비판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비판을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판받는 사람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똑같이 비판하기 마련입니다. 과연 이런 방어적인 태도가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오히려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서야 가능했습니다.
특히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늘 평가되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 행동, 심지어 표정까지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번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함부로 나를 평가한다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기에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평가가 더 나은 내가 되는 자극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런 마음을 가져야 부드럽고 다정하게 사람들과 관계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타인과의 화합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도 비판받고 평가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판과 평가에도 사랑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기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지닌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이겼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라고 말씀하시지요. 제자들의 이 작은 승리가 사탄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꺾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에 대항하는 노력을 통해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이름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철저하게 사랑에 있습니다. 주님을 배제한 채, 자기 능력만을 내세운다면 또 세상에서 말하는 외적인 성공만을 내세운다면 악을 물리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루카 10,20)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는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이보다 더 크고 영원한 기쁨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진짜 성공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길 잃음의 연속입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기를(허준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단순함과 비움, 사랑과 나눔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와 힘은 불완전하고 덧없습니다. 가난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게 됩니다.
가난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입니다. 소유를 버릴수록 오히려 더 큰 자유가 열립니다. 가난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채워짐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을 때, 모든 것이 형제가 되고 모든 것이 자매가 됩니다.
가난은 자기 힘이나 재물에 기대지 않고, 하느님의 섭리에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소유와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먼 존재가 아닌, 가까이 계신 형제, 친구처럼 체험했습니다. 가난과 겸손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소유와 집착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을 선택하며, 모든 피조물과 사랑으로 연대하고,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한 성인입니다. 삶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은 다름아닌 단순함과 비움입니다.
마태오복음 1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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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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