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그를 감싸 안아 돌보아 주시고,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네.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들어 올려 죽지 위에 얹어 나르듯,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셨네.
하느님, 비천한 이들과 어린아이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니 저희가 복된 데레사의 길을 충실히 따라 그의 전구로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뵈옵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느헤 2,1-8)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저를 제 조상들의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복음
(루카 9,57-6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느헤 2,1-8
오늘 제1독서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저를 제 조상들의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임금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기 때문에,
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3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5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때에 왕비께서도 옆에 계셨는데, 임금님께서는 “얼마 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으므로, 나는 임금님께 기간을 말씀드렸다.
7 나는 또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관들에게 가는 서신 몇 통을 저에게 내리게 하시어, 제가 유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저를 통과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8 또 왕실 숲지기 아삽에게도 서신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집 곁 성채의 문과 도성의 벽, 그리고 제가 들어가 살 집에 필요한 목재를 대게 해 주십시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루카 9,57-62
오늘 복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1일
천승녕 가브리엘 신부
✚ 아기 예수 성녀 데레사 소개 00:06
✚ 10월 교황님 기도지향 01:48
✚ 미사시작 02:05
✚ 강론시작 10:2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사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물질적 편안함을 포기하고 살 수 있는지, 곧 가난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현재 나의 삶이 예수님을 따라 가난을 실천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이’(아나빔)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돈을 벌 수 있지만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을 뜻합니다. 가난하기에 하느님께 의지하며,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재물에 초연하고, ‘가진 것이 없더라도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은 세상을 곧 없어질 것으로, 먼지처럼 여깁니다. 그러하기에 세상 것들에 초연하고 그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가난을 먼저 선택하면 됩니다.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없이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로 답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 대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겁주시는 것입니까? 시큰둥하시는 것입니까? 마뜩잖아하시는 것입니까? 결과적으로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실 리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는 것보다 당신이 더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열망이 10이라면 주님의 열망은 100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답이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겁주시거나 엄포를 놓으시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각오하라는 것이고, 더 비장한 마음으로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사랑으로 따르라고 밝고 긍정적인 어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고통과 어려움을 각오하라고 어둡고 부정 어법으로 말씀하시는 걸까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러고 보니 당신을 따르라는 모든 말씀에 조건으로 붙은 것을 보니
ㅡ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라,
ㅡ 부모와 자식 형제들 모두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
ㅡ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루카복음 14장을 보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미움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애인한테 차인 사람이 그 미움 때문에 당신을 따르는 것처럼? 아닙니다. 가장 애착하는 사람까지 끊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으로 따르라는 말씀이고,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무릅쓸 정도의 사랑으로 따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사실 최악을 각오하는 것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는 따를 수 없습니다. 최악을 각오하게 하는 그런 사랑 없이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는 대조되는 세 인물과 그에 따른 예수님의 세 가지 태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두 번째 사람>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세 번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따라나서겠다는 사람은 내치는가 하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는 가지 못하게 하고,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는 이에게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제자 됨의 가르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 역시, 당신을 진정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제자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를 더 앞세우는 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또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는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그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엇보다도 ‘앞서 먼저’, 자신의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이임을 말해줍니다.
결국, 뒤를 돌아다보지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이요, 죽음의 나라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늘나라를 앞세우는 일입니다. 거처할 곳이 묻혀 썩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대체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있는가?”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62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의지는 가치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9장 57-62절을 통해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려는 세 사람의 대화를 묵상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 9,51)라는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지금의 비틀거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오늘은 그 목적지의 ‘가치’에 대해 묵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목적지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예수님의 ‘의지’를 결정합니다. 그 가치가 높을수록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은 바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제자들의 의지입니다.
한 사람은 "어디든지 주님 가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자발적으로 나서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답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루카 9,60) 그리고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62)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을 말리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를 존중하시지만, 동시에 그들이 '알고 따르도록'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끝까지 갈 의지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려면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결혼도 그렇게 산을 오르는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의지 없이 이뤄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무엇보다 결혼과 비유됩니다. 결혼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 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절대로 말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막연한 사랑만으로 결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앞둔 연인에게 선배 부부가 해주는 조언과 같습니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서로의 부족함을 인내해야 한다. 재정적인 어려움, 육아의 고됨, 시댁과의 갈등 등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준비가 되었느냐?"
이 조언은 결혼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대신 현실을 직시하고 더 깊은 사랑으로 결단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 그 가치를 찾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한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산소통 없이 등정하고, 지구상의 8,000미터 이상 14좌를 모두 무산소로 완등한 산악인입니다. 산소통 없이 8,000미터 이상의 고산에 오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문자 그대로 '죽음을 무릅쓴' 행위입니다. 폐가 터질 듯한 고통, 극심한 추위, 환각을 일으키는 고산병, 그리고 단 한 걸음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빙벽의 공포가 그를 덮쳤을 것입니다. 수많은 동료 산악인들이 8,000미터 이상의 고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죽음의 영역, '데스 존(Death Zone)'을 아무런 기계적인 도움 없이 헤쳐나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저런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메스너는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길을 택했을까요? 그가 결국 정복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높은 봉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극한의 고산에서 느끼는 고독과 죽음의 두려움,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 그는 이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인간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확장하려는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산소통 없이 오르겠다는 그의 원칙은 '최고의 순수함으로 산과 하나 되고 싶다'는 이상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장의 육체적 고통이나 생존 본능, 혹은 주변의 '무모하다'는 비난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자신이 추구하는 '존재의 가치', 즉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려움을 정복하는 순수한 정신의 승리가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궁극적인 가치가 그에게 멈추지 않는 의지를 선물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지금?’ 대부분의 명상 수행에서는 지금, 여기에 대한 가치를 최고로 둡니다. 그러나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제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에게 화가 난 제자들과 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버지의 뜻을 이뤄주는 순간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습니다.
저도 하루 중 잠자기 전을 가장 가치 있게 여깁니다. 이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어온 습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잠자기 전에 오늘 얼마나 행복했는지 점수를 매겼습니다. 저에게 잠은 죽음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내고 평생 모은 것을 바치고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서기 위해 천사와 씨름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분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의지가 줄었습니다. 잠에 대한 가치를 그만큼 잃었던 것입니다. 많은 경우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자니 평안한 잠자리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의지가 평소에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술의 또한 커다란 해악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순간, 잠과 죽음. 이 다음에 나와 셈을 하기 위해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야 하는 상황. 이 가치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잠을 통해 죽음을 연습해야 합니다. 이 순간에 최대한 가치를 두고 살 때 감정의 휘둘림 없이 매일의 의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총알이 빠를까요? 아니면 소리가 빠를까요? 정답은 총알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총소리를 들었다면, 그 사람은 총에 맞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총알이나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지구의 태양 공전 속도입니다. 총알이 300~1,200m/s인데, 지구의 태양 공전 속도는 약 30km/s입니다. 태양의 은하 공전 속도는 약 220km/s로, 지구보다도 압도적으로 빠릅니다. 이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구나 태양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하면 깜짝 놀랍니다. 예를 들어, 300km/h로 달리는 KTX를 밖에서 보면 정말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KTX를 타고 있으면 그 빠름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역시 그 안에서 그 속도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다’라는 막연한 예측이 틀렸을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스스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인 양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까지 판단하기도 합니다. 예측해서 판단하는 것보다, 기다려주고 이해하는 것이 인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측 안에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인 예측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배고플 일이 없고 아플 일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름으로 얻는 은총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또 반대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9,57)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시지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안락과 안전을 포기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루카 9,59)라고 말하자,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게 하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라고 하십니다. 가족의 의무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가족과의 작별을 이유로 미루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십니다. 미련이나 망설임보다 결단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기준만을 생각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스스로 되풀이하면서 변화하는 모습의 연속이 아닐까?(앤디 워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따라라.
작은 꽃은 작은 자리에서도 자기만의 향기를 퍼뜨립니다. 위대함은 크지 않습니다. 사랑은 작음 속에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작음’과 ‘단순함’ 안에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 수도자였습니다.
그녀의 ‘작은 길’은 크고 거창한 것에서만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위의 충실성과 순수한 사랑의 지향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세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화 데레사는 큰 업적이나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아도, 작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작은 사랑을 택하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약함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자리라 보았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일하십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작은 길”은 오늘 우리에게, 위대함은 크고 놀라운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랑의 충실함이라는 가장 좋은 길을 보여줍니다. 그 작은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참된 신앙인의 삶이 되십시오. 사랑은 모두 위대합니다.
루카복음 9장 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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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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