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25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25.
반응형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25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하까 1,1-8
오늘 제1독서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리라.

1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룻날,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에게 내렸다. 

2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4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5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6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7 ─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9,7-9
오늘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7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8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9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5일
재우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몹시 당황하는 모습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보여 줍니다. 헤로데가 왜 당황하였을까요?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소문으로 듣고 그리 된 것인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문맥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 단락인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분부를 내리시며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셨고, 제자들은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정작 복음을 선포하고 병을 고쳐 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궁금해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사람들이, 심지어 이 악한 통치자마저 예수님을 뵙고 싶게, 그분을 알고 싶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를 통하여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알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알렸습니다. 자신은 물러나고 예수님만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도의 표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먼저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볼 때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을 드러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제자들도 그분을 닮아 갔습니다. 우리도 늘 예수님 곁에 있지만 자신은 물러나 있으며 그분을 드러내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 사람들을 이끄는 참사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전을 지어라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오늘 하까이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독려하면서 성전을 짓기보다 자기 집을 먼저 잘 짓고 사는 백성을 나무라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자랑스러운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성당이 아니라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우리 공소 신자들은 공소 회장님을 중심으로 스스로 성당을 짓고 신부님을 모시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없던 시절 저희는 성미 곧 성당을 짓기 위한 거룩한 쌀을 모아, 땅을 사서 같이 농사지어 그 쌀로 더 큰 논을 사고 그렇게 건축기금을 마련했고, 성당을 지을 때도 어른들은 물론 어린 저희도 학교가 끝나면 벽돌이라도 나르며 사제의 도움이나 외부의 도움 없이 몸소 성당을 지은 자랑스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진정 그랬습니다. 오늘 하까이 예언자가 나무라는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저희는 자기 집은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어도 주님의 집만은 잘 지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제가 부유해지면서 나의 공간을 소유하고 잘 꾸미면서 주님의 집에 대해서는 소홀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있을 곳은 더 이상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 나의 집, 나의 방이 되었고, 내 마음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아니라 나뿐인 내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집이 아닌 자기 집은 자기만의 공간(Privacy)이 되었고, 이웃과는 담을 쌓고 사는 단절의 공간이 되어 자연 공동체는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공간 개인주의가 요즘처럼 고립의 정신이 지배하는 혼밥, 혼술, 혼족 시대엔 점차 공간 이기주의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짐작하시듯 공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공간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공간 이기주의자가 시간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자기를 위한 시간만 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이런 저에게 하까이 예언자는 다시 주님의 집을 지으라고 예언하고,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내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프란치스고도 이제라도 주님의 집을 다시 짓기 시작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성전 건물이 아닙니다. 나의 벽과 집을 허묾으로써 이웃과 함께하는 주님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주적 형제애로 인간 중심주의를 허묾으로서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고, 피조물과 함께하는 우주적 공동체인 주님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9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
소문으로만 듣던 
당신을 봅니다.

깨지고 부서진 아픈 이들, 
작고 가련한 이들, 
무능하고 힘없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어쩔 수 없어 힘없이 쫓겨 
제 곁에 몰려와 있는 이들,
이들이 바로 당신입니다.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제 곁에 와 계시고, 
제 안에 숨어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혼자서는 깨끗해질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그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고 당황합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 즉 의로운 예언자 요한의 목을 벤 기억이 그의 눈을 가립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자신의 끔찍한 죄가 그 거룩한 빛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그저 ‘다시 살아난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옛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의 죄가 그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교만이라는 죄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죄는 어떻게 정화될 수 있을까요? 아이의 죄는 어떻게 사라집니까?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더 깊이 알아갈 때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알아갈수록 겸손해집니다. ‘내가 무엇이길래,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 이런 고생을 하실까?’ 하는 깨달음이 아이의 교만한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감사와 사랑이 싹트게 합니다. 교만이 죄라면, 겸손은 깨끗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모를 더 알고 사랑하는 만큼 더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를 알아갈 방법이 없다면, 혹은 부모의 사랑을 오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나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을 보십시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정신 질환과 가난, 그리고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어린 시절 입양되었던 고담시의 가장 유력한 인물, 토머스 웨인이 자신의 친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입니다. 그는 자신의 뿌리,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진실은 잔혹했습니다. 그는 토머스 웨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심지어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할 부모가, 오히려 그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막혀버린 그는, 세상을 향한 마지막 신뢰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받는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버려진 고아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고, 그는 희대의 악당 ‘조커’로 변해갑니다. 그는 부모를 알아갈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정화되지 못하고 파멸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반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6.25 전쟁 때 흥남부두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며, “이제부터 네가 가장이다. 가족들을 잘 지켜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평생의 짐이자 사명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의 광부가 되고, 베트남 전쟁의 기술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돈을 법니다. 그의 평생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평생을 찾아 헤맸던 막냇동생을 기적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동생을 통해, 아버지가 자신과 막냇동생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통곡합니다. 아버지의 희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고,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고 정화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려는 노력 없이는, 우리는 결코 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부모와 함께 살며 부모를 알아가듯이, 우리도 매일 미사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알아가지 않으면 깨끗해질 방법이 없듯이, 우리도 창조자를 알아가는 것 외에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EBS의 ‘학교란 무엇인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0.1%의 비밀’ 편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비결을 탐구했습니다. 수능 모의고사 전국 석차 상위 0.1%에 들어가는 800명의 학생과 평범한 학생 700명을 비교하면서, 두 그룹 간 어떤 차이가 성적 격차를 이어지게 하는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 결과는 좀 의외였습니다. 0.1%에 속하는 학생들은 지능지수가 별로 높지도 또 생활 습관이 특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모 경제력과 학력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실험에서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서로 연관성 없는 단어 25개를 3초씩, 75초간 보여준 뒤 얼마나 기억하는지 묻는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방금 본 단어 중 몇 개나 기억할 수 있는지’ 그 예상치를 말하게 한 다음, 실제 기억하는 단어를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실제 기억하는 단어는 상위 0.1%의 학생이나 평범한 학생이나 똑같았습니다. 단지 0.1% 그룹 학생들은 예상한 점수와 실제 기억한 단어 수가 거의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학생은 달랐습니다. 스스로 기대한 것과 달리 들쑥날쑥했습니다. 즉, 0.1% 학생들은 자기 실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일반 학생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만이 학습 능력을 갖추고, 자연히 성적도 뛰어났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알려 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데 집중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을 알려 하고, 그분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의 모습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와 정반대 길을 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주가 되기 위해 그는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즉,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막연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빠졌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던 그가 지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알지 못하기에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엘리야가 나타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말을 합니다. 이들도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과거 인물들과 연결하여 해석할 뿐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바르고 뛰어난 신앙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죄를 짓거나, 세상 삶에 파묻혀 살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 주님의 활동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과연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오늘의 명언

자연이 어떻게 역경을 헤쳐나가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당신은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버니 S. 시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하까 1장 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925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31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