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아모 6,1ㄱㄴ.4-7)
이제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 제 2독서
(1티모 6,11ㄱㄷ-16)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아모 6,1ㄱㄴ.4-7
오늘 제1독서
이제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4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5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 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6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7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1티모 6,11ㄱㄷ-16
오늘 제2독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3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대에게 지시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루카 6,19-31
오늘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8일
유상혁 세례자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4:4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지옥의 다른 이름은 이기심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라자로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 16,14)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부자의 태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웃고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들조차 사랑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부자는 왜 불타는 지옥에 갔을까요? 예수님 시대에 재산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좋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16,25)라고 하였듯이 재산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디 주인의 의도대로 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과 고통이라는 악을 바라시지 않으므로 재산을 받은 사람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재산이 자기 것이니 자기를 위해서 썼습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갇혀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즐거움만 보았기 때문에 라자로가 자기 대문 앞에, 그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보지 못하였습니다.
살아 있었을 때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존재하였던 큰 간격은 죽어서도 유지됩니다. 그가 살아서 라자로와 관계를 맺었다면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자기 안에 갇혀 살았기에,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께도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옥의 다른 이름은 이기심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의 역전
거지 나라로와 부자에 대한 오늘의 비유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병자들, 죄인들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복음들보다 더 강조합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는 없는 얘기들이 있는데 이 얘기들이 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는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들, 율법 학자들, 바리사이 등 사회적 강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 불행 선언을 전하는 얘기도 있습니다. 상속 시비,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그 예이며 마태오 복음은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하다고만 얘기하는 데 비해 루카 복음은 사회적 강자들이 불행하다는 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도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로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역전되는 운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 바로 이름입니다. 현세에서는 보통 사회적 강자들이 이름을 날리고 약자들은 이름도 없지요.
예를 들어 대기업 총수는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알지만 서울역 앞의 노숙자는 그저 노숙자라 부르고 아무도 이름을 모릅니다. 그래서 노숙자를 일컬어 성은 노이고 이름은 숙자라고 농담하곤 하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반대로 약자인 라자로는 이름이 있고 강자인 부자는 이름도 없이 그저 어떤 부자라고만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하늘나라에서는 재물이나 부자라는 것이 얼마나 별거 아닌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부자는 무조건 지옥이고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천국이라고 이해하고, 주님은 무조건 부자를 증오하고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식으로 이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식의 이해는 예수님을 계급 투쟁적인 공산주의와 같이 보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이 비유도 부자든 가난한 자든 관계, 곧 사랑을 살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았느냐가 관건입니다. 따라서 부자의 문제는 돈이 많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먼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인데 보통 재물이 많으면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루카 복음뿐 아니라 모든 복음의 관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물신(物神)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더 힘 있고, 더 가까우며, 더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 경우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연히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존재를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죽은 다음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호소할 때 라자로를 보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필요할 때는 라자로라는 존재를 떠올리지만 자기가 호의호식할 때는 라자로라는 존재를 무시했습니다. 라자로는 그의 문간에 있었기에 들락날락할 때마다 보았지만 눈여겨볼 가치가 없는 존재였고 오히려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나에게 돈이 되지 않을 존재일 뿐 아니라 내가 조금이라도 인정을 베풀려고 하면 내 돈을 축내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서 이런 존재에 대한 인정은 아예 싹둑 잘라내야 하고 아예 눈길조차 주지 말아야 합니다. 보고 나면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 아예 보지 않거나 못 본 체해야 합니다.
저도 종종 그러합니다. 서울역에 갈 때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갈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가면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 내가 피하면 안 되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고작 화살기도를 그들을 위해 바치며 앞으로 지나쳐가곤 합니다.
이런 저에게 어제 축일을 지낸 빈첸시오 성인은 “우리 마음의 새로워진 열성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무엇보다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내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우리에게 주인이요 지배자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오늘은 연중 26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한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가 나타날 떼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사실, 이 비유의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며,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렇습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이제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는 복된 사람’, <장운철 마르티노 수사님의 첫서원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강론> 전에 저는 마르티노 수사님께 ‘무엇을 청하는지’를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리고 마르티노 수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더욱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동행’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동료들’과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동시에, 이 길은 ‘자비를 베풀면서 가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받아먹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베풀어야 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한편이 무너지면, 수도생활은 활기를 잃고 맙니다.
오늘 <복음>인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비를 입었건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수도승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유기 서원’을 하는 마르티노 수사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수도승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수사님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저희가 함께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님께서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와 ‘받은 자비를 베풀면서 하느님과 길을 함께 갈 것을 공동체 안에서 청원’하였습니다. 이제 수사님께서는 이미 받은 이 “자비”로 늘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르티노 수사님! 복된 서원생활 되셰요.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20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심판은 예상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자와 라자로’ 비유를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고 라자로가 천국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으며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다시 살려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 달라고 간청했을 때의 아브라함의 대답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바리사이들의 상징인 부자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가르침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라자로는 언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을까요? 부자는 모았고, 라자로는 개들에게도 몸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살게 만든 첫 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수 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예를 보십시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학대받는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그에게 '약하면 죽는다, 오직 강한 힘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생존 지향적인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약육강식의 '정글'로 보았고, 타인은 언제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가 정상으로 보였을까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글보다 먼저 총 쏘는 법과 권투를 가르치며 '관계보다는 자기 생존을 위해 타인을 이겨야 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헤밍웨이는 평생을 경쟁과 투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했고, 그 결과 그의 내면은 안식 없는 '정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존을 스스로 파괴하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생존 지향적 삶'을 선택한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죽기까지 사랑하며, 원수까지 용서하는 '관계 지향적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정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랑은 오히려 독(毒)과 같은 지식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그들에게, 스스로 죽기까지 내어주는 분의 진리는 너무나도 낯설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죽여야 하는 이들이 죽으신 분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같이, 자신들의 율법과 생존 방식만을 고집하며 새로운 진리를 외면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삶 또한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근원적 선택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저는 네 살 때 할머니의 죽음으로 저의 첫 기억을 시작합니다. 할머니의 죽음에 관해 묻는 어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죽음은 땅속에 묻혀 계속 잠자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잠’이 두려웠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나도 할머니처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에 떨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너무나 편안한 밤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그날 친구들과 너무나 행복하게 뛰어놀았던 것입니다. 마음껏 웃고, 함께 서로를 챙겨주며 온종일 신나게 보냈던 날이었습니다. 그 행복한 기억이 저의 두려움을 잊게 해준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행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관계’에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근원적 친교를 위한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적 선택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사제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 선택이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으로 정해질 수 있지만, 이 선택이 영원히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새로운 스승들, 곧 ‘모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관계를 지향하는 지혜로운 삶’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나 예언자들이 가르친 것은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 워런 버핏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자선사업에 기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홍콩의 유명 배우 주윤발 또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소유가 아닌 나눔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현대판 ‘모세들’입니다.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생존 지향적' 삶에서 '관계 지향적' 삶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이들의 지혜를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곧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는 이들이 어찌 천상의 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성녀 마리아 고레티를 살해했던 알레산드로 세레넬리의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 지향적 삶'의 깨달음이 어떻게 회개와 신앙으로 이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2살의 알레산드로는 11살 마리아 고레티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생존을 위해 어린 생명을 빼앗는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고,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마음은 증오와 죄책감, 그리고 자기 보존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감옥에서 잠든 알레산드로의 꿈에 마리아 고레티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그에게 순결한 백합 일곱 송이를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알레산드로는 마리아의 순수하고 용서하는 영혼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 '용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는 해방감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 고레티의 용서는 그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관계 지향적 행복'의 씨앗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의 모범을 통해 '용서가 곧 행복'이라는 것을 먼저 배우고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알레산드로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라는 '새로운 모세'를 통해 먼저 '용서가 주는 관계의 행복'을 경험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근원적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였던 존 록펠러의 삶이 바로 이 지혜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33세에 백만장자,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돈 때문에 쓸데없는 보험료가 아까워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만큼, 그는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의 몸을 병들게 했고, 의사는 그에게 1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절망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마지막 진료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가 들어왔습니다. 거기엔 이런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 20,35)
바로 그때, 병원비 문제로 다투는 한 어머니의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록펠러는 조용히 비서를 불러, 아무도 모르게 그 소녀의 치료비를 전부 내주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소녀는 건강을 되찾았고, 록펠러는 멀리서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평생 처음 느껴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돈을 모으는 삶이 아니라, 돈을 나누는 삶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가 나누기 시작하자 온몸을 괴롭히던 병도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결국 98세까지 장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심판은 나의 예상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깊이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 ‘생존 지향적’ 혹은 ‘관계 지향적’인 근원적 선택을 하고 있으며, 이 선택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근원적 선택을 새롭게 다짐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어젯밤 남편과 심한 부부싸움을 한 자매가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친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아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이기적이다.’ 등등 멈추지 않고 흉을 말했습니다. 한참 동안 듣던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을 짐승이라고 생각해 봐. 그러면 기특하다?”
“원래 남편을 짐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나는 기특하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어. 무슨 말이야?”
“짐승이 화장실을 알아서 찾아가고, 또 물까지 직접 내리잖아. 또 자기 찾아 달라고 낑낑대지도 않고, 집에 알아서 찾아오잖아. 얼마나 기특하니?”
맞습니까? 사실 생각을 바꾸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는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의 관점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란 힘 없는 사람들이 따르는 그렇게 도움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되면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결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부자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옷은 당시 최고급 사치품으로 그가 누리는 지위와 부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었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는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그 이름의 뜻이 ‘하느님께서 도우신다’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져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자 합니다. 여기에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는 비참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자로는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 곁으로 가게 되었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가치가 역전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삶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삶에서의 선택이 중요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어서, 지금 당장 회개하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느님께 받은 재물과 시간은 자기 편안함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바꿔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후회할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일상 속 어디에나, 타인과의 대화나 꿈속에도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들이 있다(류시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큰 죄는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편에 서 있고, 또 다른 이름의 폭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라자로를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부자의 비극은 죽음 이후에야 깨달았다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우선순위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누어야 할 마음의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입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깊은 죄이며, 습관화되면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장 심각한 영적 병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이름을 기억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 또한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잊힌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거룩한 주일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라자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고 맞이하는 사랑의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바로 무관심을 넘어, 사랑으로 깨어나는 주님의 날입니다.
티모테오1서 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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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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