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백성이 성인들의 지혜를 기리고 회중이 그들을 칭송하리라.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으리라.
하느님,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2025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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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2,22-28)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1,19-28)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26)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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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 2,22-28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요한 1,19-28
오늘 복음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2일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소개 00:06
✚ 교황님 1월 기도지향 01:52
✚ 미사시작 02:11
✚ 강론시작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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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대 바실리오 성인과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로, 우정과 신앙 안에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한 평생지기입니다.
바실리오는 당대 최고의 교육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테네에서 공부한 뒤 수사학 교사로 크게 성공합니다. 세상의 명성에 취하였던 그는, 누이 마크리나의 도움으로 깨우침을 얻고 회심하여 금욕적인 이상에 삶을 바칩니다. 그리고 수도승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주교로 서임되어 사목자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생전에 ‘대 바실리오’라 불리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껏 받습니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수도 생활에 자신을 바칩니다. 그러다가 나지안조의 주교였던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품을 받은 뒤 갑자기 몸을 숨겨 버린 그는 뒷날 자신의 저서 「연설」에서 당시의 심경을 밝힙니다.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레고리오는 사제나 주교로 봉사하기보다는 은수 생활로 돌아가기를 끊임없이 바라던 성인이었습니다.
힘겨웠던 박해 시기가 지나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신앙의 불꽃이 시들고, 수도승들은 극단적 엄격주의와 영적 엘리트주의로 치닫던 시절에 대 바실리오 성인은 이 모든 것 뒤에 ‘하느님 말씀에 대한 복종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경 말씀이 수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과 행실의 토대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혜안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머물되 안주하지 않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답하고, 프란치스코도 이 면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하며 이제부터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 뒤 길을 가던 중 강도로부터 너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프란치스코도 서슴지 않고 답하였지요.
자기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라고. 아마 성인들은 다 서슴지 않고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성인들이 저는 오늘 부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저는 부럽습니다.’라고 한 것은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 부럽다는 느낌이 다분히 있지요.
그러니까 전엔 저도 제가 누군지 서슴지 않고 답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해 부끄러운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의 제가 지금보다 낫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지금 부끄러우면서도 부러운 것인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지금이 더 마음 편합니다.
그것은 옛날의 제가 서슴지 않았던 것은, 성인들의 서슴지 않음과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섣부른 자신감이었거나 교만한 자기 정체 의식이었고 지금의 제가 오히려 겸손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나는 프란치스칸이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망설이지 않았고, 그런 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프란치스칸 정체성에서 의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제가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게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면에서 부끄럽고 그래서 지금은 서슴지 않을 수 없고 망설입니다.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모호함이 없고, 꿀리는 것이 없고, 켕기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저는 저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꿀리는 게 있고,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의 이런 제가 마음 편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편함의 한 자락은 이런 저에 안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자락은 겸손이 주는 편안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까치발을 하고 서 있던 제가 바닥에 편안히 앉아 있는 것과 같고, 적어도 더 이상 까치발은 하고 있지 않은 그런 편안함일 것입니다.
지금의 저의 겸손은 저의 바닥을 보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바닥에 편안히 머무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저의 편안함은 오늘 서간의 당부대로 하느님 안에 제가 편안히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떠나 여기저기 표류하지 않고, 하느님께 단단히 정박하고 있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웃거리지도 않고,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이설들에 이리저리 현혹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서간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적’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편안함은 좋은 것이지만 편안함에의 안주는 나쁜 거지요. 그러니 하느님 안에 머문다고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지 않는 안주와 특히 죄에의 안주를 경계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나 자신을 외치는 이인가? 아니면 내 안에서 외치는 이를 드러내는 소리인가?
사실,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곧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있는 화살표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피리를 부는 이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를 담아내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는 진정 비워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은 참으로 비워진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드러내는 데서 오는 기쁨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워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추하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이들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것처럼 추한 모습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은 자신의 발밑에 다른 이를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발밑에 내려갈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도 요한이 받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받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21.22)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이인가요?’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 살고 있는 이인가요?’
‘예수님과는 어떤 결속을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이인가?’
저는 이렇게 대답해 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새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벗이요.’ 라고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23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주님!
화살표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붓이 되어 당신의 말씀을
삶으로 쓰게 하소서.
피리가 되어 당신의 노래를
온몸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생명의 춤이 되고
당신 축복의 강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요한은 기본기이고 그리스도는 목표다.
오늘 복음인 요한 1장 19-28절은 요한 세례자가 자신을 메시아가 아니라,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겸손히 밝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길이며 기본이며, 예수님이 궁극적 목표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기본과 목표의 관계는 우리의 신앙과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기본이 없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서 기본은 회개이고 목표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현대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녀 체력』의 저자인 이영미 작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건강을 돌보지 않아 삶이 무너졌던 경험을 공유합니다. 가족과 일의 부담으로 인해 체력이 떨어지면서 어느 것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깨닫고 체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마라톤과 사이클, 수영 등 철인 삼종 경기에서 보통 남성들을 이길 정도입니다. 그녀에게 체력을 키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가족과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강화하니 마음도 따라오고, 목표가 달성 가능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원칙과도 일치합니다. 코헬렛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제때가 있고,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준비의 시기가 필요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기본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기본을 다져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9-22절에서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의 임무는 막대했지만, 그는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지시를 따라 하나하나 방주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준비 덕분에 방주는 폭풍을 견뎌내고 가족과 생명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왕이 되기 전에는 목자로서 기본을 다졌습니다. 사무엘기 상권 17장에서 골리앗과 맞설 때 다윗은 최신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어린 시절 길렀던 용기와 기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기본기를 통해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마태오 복음 7장 24-27절의 예수님 비유에서 현명한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가 나옵니다. 현명한 건축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입니다. 폭풍이 몰아쳐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육체적, 정서적 모든 영역에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다시 이영미 작가의 이야기를 돌아보면, 그녀는 기본을 간과했을 때 삶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깨달았습니다. 건강, 신앙, 관계 등에서 기본을 무시하면 불균형과 좌절을 겪게 됩니다. 세속의 지혜도 이 진리를 가르칩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노자) 또는 “한 번의 예방은 열 번의 치료보다 낫다.”(벤저민 프랭클린)라는 말처럼, 기본적인 노력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영적 삶에서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성사를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기본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거나 목표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요한 세례자의 삶은 이러한 훈련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언자로 존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말이다”(요한 1,23)라고 선언하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축구를 하면서 기본의 중요성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축구의 기본은 같은 팀과 협력하고, 공을 잃지 않고 패스하며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구의 목표는 골을 넣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막상 경기에 들어서면 기본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골을 넣으려는 생각만 합니다. 그러면 경기당 한두 골은 넣을 수 있습니다. 실수하려 하지 않는다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기본기는 평소에 매일 다지는 것이고 실전에는 목표에 집중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말을 자주 되풀이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막상 사람을 만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훈련된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아직은 멀었지만, 이렇게 사랑에 조금씩 프로가 되어 갑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합시다.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고 건강, 신앙, 관계의 기반을 다시 세우며 하느님의 계획을 위한 길을 준비합시다. “기본을 알면 이미 전문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모르고 기본에만 집중하거나, 아니면 기본이 없는데 목표만 바라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을 마스터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목표를 향해 나아갑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길도 준비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석원 작가의 ‘나를 위한 노래’에서 세상의 행복을 어른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나고 재미있으면 행복하지만, 어른은 고통이 없어야 행복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공감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더 행복한가 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고통을 피하면 행복할 텐데, 고통의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기에 불행을 더 쉽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적고, 능력과 재주가 없는 것도 고통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니 고통이 떠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작은 기쁨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쁘게만 살라고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절제하는 것’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사랑이 있음을 말합니다.
러셀 로버츠의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절제하면서도 사랑해야 우리는 가짜 행복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더불어 나의 희생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삶이 풍성해지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자기희생도 기꺼이 선택하는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기대에 맞춰서, 메시아, 엘리야, 예언자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기대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기대를 따릅니다. 즉,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을 기쁘게 따릅니다.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세상의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를 선택하십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고통 없는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큰 고통이 동반되는 힘든 삶입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삶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 그였습니다. 자기희생을 기꺼이 선택하면서 진짜 행복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 세상에서 인정받는 삶에서만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하느님의 기대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짜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지구의 반 바퀴를 돌 수 있다.
- 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릇된 신앙을 바로잡는 기준점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겸손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겸손하고도 힘찬 고백의 새날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믿고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풀리지 않던 우리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문제의 빠른 해결과 해답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나는 겸손은 언제나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의 교만을 버려야 깨달음은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겉모양만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그리스도십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앞에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짊어진 고민들을 그리스도께 내려놓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마음은 따듯합니다.
교만하지 않기위해 겸손하기 위해 늘 그리스도께 기도드립니다. 겸손이 은총입니다. 낮추면 듣게되고 낮추면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스도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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