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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0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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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

주님, 주님을 믿는 저희를 인자로이 비추시고 주님 영광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저희가 구세주를 올바로 알아보고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2025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요한 2,29―3,6)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29-34)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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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요한 2,29―3,6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네.

 

 

요한 1,29-34
오늘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3일
은성제 요셉 신부

 

✚ 교황님 1월 기도지향 00:23

✚ 미사시작 00:43

✚ 강론시작 07:1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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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뒤로 하는 성탄 시기에 우리는 독서 말씀으로 요한의 첫째 서간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요한 서간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확고하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완고한 세상에 휩쓸려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1,33)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1,31)라고 거듭해서 증언합니다. ‘전에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제게는 무엇보다 강렬한 증언으로 다가옵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이 말이 ‘지금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신학교 입학을 위한 교리 시험을 치르는데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한참을 고민한 뒤 ‘진리의 길로 나를 부르시는 완고한 스승’이라는 요지로 답안을 적었습니다. 다행히 신학교에 합격하였지만 저는 분명히 압니다. 그때 저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와줄 이 예수님밖에 없노라 매달렸더니 그 비참에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더 이상 스승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령을 영접한 겸손이어야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세례자 요한이 두 번이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였다는 말은 알고 난 뒤에 하는 얘기이고, 제대로 알고 난 뒤에나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알기 전에는 오히려 안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알지 못하였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앎이란 것이 보통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알지 못하는 자신을 알지 못해 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처럼 알지 못하였다고, 자기의 모름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마찬가지 이유로 알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을 부끄러워해야겠지요. 

왜냐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더 배우려고 할 것이고, 알지 못함을 겸손히 인정할 때 우리는 알려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계신다고 했는데 오늘 복음에서 너희만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나도 몰랐었다고 하며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알게 되었다고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뵙는 것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의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눈은 보이는 것밖에 볼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보여주시지 않으며 볼 수 없는 법인데 감사하게도 볼 수 있는 분으로 오셔서 뵙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볼 수 있는 분으로 오셨어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음은 사도들의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서 뵙고 그 많은 기적을 봤음에도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데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눈이 있어도 보여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보여주셔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거지요. 

그렇다면 어떤 눈이 볼 수 있는 눈입니까? 앞서 봤듯이 겸손의 눈은 보기 위해 기본입니다. 그러나 겸손도 영적인 겸손이어야 합니다. 그저 교만하지 않은 것만으로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비롯하여 있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겸손이지만 하느님을 비롯하여 영적인 것들은 영이 아니면 볼 수 없고, 그러므로 성령을 영접한 겸손이어야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성령이 머무시는 예수를 볼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요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뵐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자기 소유의 것들이 다 없어지고, 자기 능력이라고 하던 것들도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마침내 철저히 자기마저 무화되어 자신이 성령의 궁전이 되기에 합당한 겸손이 되었을 때 성령도 임하시고 주님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곧 ‘유월절의 어린 양’과 ‘주님의 종인 어린 양’입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탈출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되는 ‘새 시대’를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입이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향이 있는 ‘봉헌’의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내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29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주님!
죄를 탓하기보다 
스스로 짊어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여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기꺼이 바치는 삶이기에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도 없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놓는 삶이기에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불의 세례 받는 법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에 관해 말을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의 세례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요한이 불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바로 물의 세례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하얼빈’입니다. 주인공 현빈은 처음에 안중근 역을 맡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칫 현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서 그 인기를 잃게 될까 봐 거부하려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빈은 그런 이유 때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무게감을 자기가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근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혹시나 자신의 부족한 연기가 그분의 위대함을 저해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해 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영하의 추위에서 관객을 속이지 않는 현실감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인지, 현빈은 마지막 장면을 다 찍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그 무거운 압박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중근의 무게가 컸으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가 현빈처럼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요? 현빈은 그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고 실제로 추위와 전투 장면 속에서 그를 체험해냈습니다. 그만큼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인생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이 ‘불의 세례’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웅’이나 ‘하얼빈’과 같은 안중근 의사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뮤지컬이나 영화를 본다면 이는 물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분으로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알리려는 누군가에 의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것으로 그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의 세례를 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리려고 할 때 불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제가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건 불의 세례였습니다. 눈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제가 되어 그분의 증거가 되겠다는 물의 세례를 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다음에 온 것입니다. 불의 세례를 받아야 그분으로부터 직접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에서 유관순 역을 맡았던 고아성 배우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 배우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심장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불의 세례인 것입니다. 물의 세례를 주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 태어남의 축복입니다. 이 장면을 8호실 안에 있던 25명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낭독했고 컷이 되자마자 다들 약속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뜻깊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주연 짐 카비젤은 이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짐 카비젤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찍기 직전 의사로부터 심장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멜 깁슨 감독은 계속 찍을 것이냐고 짐에게 물어봅니다. 짐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저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는 자신에게서 탈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곧 물의 세례를 주려고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이에 관하여 짐 카비젤은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모두들 부활은 원하지만, 고통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증언하는 삶

작년에 새영세자 첫 고해성사가 생각납니다. 세례받은 뒤 한 달이 지났을 때, 보통 첫 고백을 합니다. 열 분 넘는 분을 1시간에 걸쳐 고해소에서 만났습니다. 수녀님께서 잘 준비시켰는지 자기 죄를 성실하게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신 분들도 의무감에 억지로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이런 고백에는 당연히 어떤 감동도 없고 그냥 무미건조한 대화로 성사에 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새영세자들은 달랐습니다. 긴장이 묻어나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해성사를 모두 마치고 수녀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 고해성사를 잘 주셨나 봐요?”
 
“왜요?”
 
“고해소에서 나오는 분들이 다들 눈물을 훔치면서 나와서요.”
 
수녀님의 이 말씀이 오랫동안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고해소에서 특별한 훈화를 한 것도 아니고, 신앙적으로 꾸짖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성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에, 저는 성사 잘 주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는 고해성사를 잘 준비한 신자가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해성사의 은총이 사제인 저에게도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곧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게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진심이 주님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임을, 사랑 그 자체인 분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담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거짓된 삶, 가식적인 삶, 위선의 삶을 통해 주님과도 연결되지 못하고, 나의 이웃들과도 연결되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 주님과 연결된 삶을 사셨습니다. 진심을 담아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삶으로 주님과 우리의 연결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는 그의 힘찬 목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도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합니다.
 
진심을 담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닌, 진심을 담아 주님과 연결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과 주님이 연결될 수 있도록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

- G.E. 레싱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과연 나는 보았다.

셀 수 없는 사랑을 보며 깨끗한 희망을 만나는 체험의 시간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없으시면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십니다. 

우리는 모두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길을 내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가장 큰 사랑은 어린양 그 자신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사람의 아들을 봅니다.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우리를 깨끗이 하시는 종이 되십니다. 종이 되시어 하느님의 어린양은 자신을 바치며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어린양은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십자가 인호를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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