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았네.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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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3,2-6.12-14)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제 2독서
(콜로 3,12-21)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오늘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 오늘 말씀 카드
(콜로 3,17)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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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집회 3,2-6.12-14
오늘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콜로 3,12-21
오늘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루카 2,41-52
오늘 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29일
전진 도미니코 신부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소개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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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빠져 나오기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양아버지였던 요셉과 혼인한 뒤, 당시 임금이 아이를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하여 이집트로 갔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떠돌이 생활을 합니다.
아들 예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일은커녕 어부들과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은, 실상 행복한 가정이나 기쁨이 흘러넘치는 가정, 또는 자녀들이 성공해서 부모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정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가정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루카 1,38 참조)을 가지셨고, 요셉 성인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마태 1,24; 2,13-15.19-23 참조)으로 살았으며,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리 2,8)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도 순종하셨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때조차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루카 2,51 참조).
오늘날 많은 가정이 사랑을 잃고 가족들은 외로워합니다. 가정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순종, 마음속에 간직함,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 이것이 가정이 성화되는 길이고,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빠져 나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시대의 성가정
우리 시대는 혼밥, 혼술의 혼족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도 아니 혼족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혼자 사는 족속 또는 혼자 사는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제가 한심해하는 것은 신생아 수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는 인구 소멸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 걱정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프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세태이니 아무 가정이라도 많아지면 좋겠다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에서 성가정 운운하는 것이, 과연 통하는 얘기일지 의문이 들면서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패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성가정의 의미를 제대로 또 적극적으로 살아, 다시 말해 우리 가정을 먼저 복음화하여 온 가정을 복음화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널리 풍기는 것이지요. 가능하다면 성가정 TV도 만들고 그럴 수 없다면 ‘나 혼자 산다’는 프로에 대항하는 프로그램을 기존 평화방송에 마련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금을 모으고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받아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지원하고 홍보도 하는 사업도 벌이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많은 신자 가정이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성가정을 모범 사례와 희망 공동체로 매체를 통해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모범이 될 성가정입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공동체와 요셉, 마리아, 예수의 성가정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성령의 사랑이 가정의 중심이 되는 가정입니다.
방금 저는 성령의 사랑을 언급했는데 성령의 사랑을 좀 더 얘기해보겠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다양한 가운데서 일치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르지만 하나를 이루고,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일치가 조화를 이루고, 한마디로 사랑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최고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인데 그러나 우리는 조화를 이루는 데 보통 실패하여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보통은 자유를 선택하고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데 혼족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자유롭고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자유롭기를 자기가 바라는 만큼 상대에게도 자유를 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바라는 사랑을 하기에 실패합니다.
나는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너는 내가 바라는 너이길 바라는 겁니다. 꼭 대가를 바라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면 너도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면 너도 그만큼은 사랑하기를, 내가 이런 사랑을 했으면 너도 그런 사랑을 하기를, 내 사랑을 받은 만큼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어떤 때는 그 이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더 고약한 바람도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기를, 내 곁에만 있기를 바라며 사랑의 구속을 하고 자유를 박탈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슬플 때는 위로가 되어주고, 내가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고, 만사 귀찮을 때는 적당히 거리를 떨어져 있어 주고, 내가 말할 때는 언제나 맞장구쳐 주고 수시로 사랑을 표현해주기를 바랍니다.
상대방도 슬프고 힘들 때가 있는데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라는 것이 모두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없는 성령의 사랑을 가족 서로 실천하는 성가정이 많아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가정을 이루는 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이초록,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정’이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집회 3,6)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신앙공동체 구성원의 신분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곧 하느님의 호의를 입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선택받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으로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로 제시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준재임을 말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명하고 지냈다.”(루카 2,51)고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곧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으며,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거나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 계시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그 말씀이 품은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하되, “말씀”이 주인으로 머무르게 할뿐만 아니라, ‘주인이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순명과 섬김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순명으로 섬기고, 섬김으로 순명하며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49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가정의 핵심은 각자의 확고한 사명 인식에 달렸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인식이 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모습만 보면 일치하는 가족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말을 안 듣고 성전에 남아있었고 성모님과 요셉은 아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한 가정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 각자 다른 확고한 사명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떠올려 봅시다. 이 영화는 일상에 갇히고 권태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부부가 공동의 사명을 발견하고 함께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가족이 각자의 욕망을 넘어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는 진리를 반영합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싸우다가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가족의 공통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모두가 천당 가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 가운데서도 가족이 서로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가 가진 ‘욕망’ 때문입니다.
영화 ‘17 어게인’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게 합니다. 고등학교 때 유망한 농구선수였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당장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되고 회사에서는 능력이 없어 명퇴하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자녀들도 무능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어보니 다시 17살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운동 잘하고 인기 있는 학생이 됩니다.
주인공은 학교에서 자기 딸과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각자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탓을 가족에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농구로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상황에서 그는 주저 없이 아내를 다시 택합니다.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른 욕망이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가정은 다시 정상화됩니다.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사명을, 성모님은 이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해야 하는 사명을,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각자 다른 사명이지만, 같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명이기에 가족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모님은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라며 남편을 앞에 둡니다. 요셉 성인인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청을 알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절대 하나인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불만만 쌓여갈 것입니다.
존과 아일린 크롤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엑스트라오디너리 메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 자녀 중 두 자녀가 폼페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10대 초반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존은 절망으로 일에만 전념합니다. 아일린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싫습니다. 둘은 한참을 싸웁니다. 그러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장 해야 할 일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제를 찾겠다고 합니다. 아내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렇게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존은 치료제를 개발하던 사람을 만나 결국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게 됩니다. 두 자녀가 완벽히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고 이 치료제는 덕분에 전 세계의 모든 폼페병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부부의 같은 사명이 있고 각자의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때만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함께 오래 바라보기만 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각자의 방식대로 깨닫고 참여할 때 그 가정은 그 뜻 안에서 성가정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예전에 아는 청년들과 야구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경기는 흥미로웠고, 역전에 역전을 거쳐 응원하던 팀이 이겨서 너무나 기분 좋은 경기였습니다. 함께했던 청년들도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재미있는 경기였는데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몰랐고, 그날이 야구를 처음 본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미식축구를 저는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예전에, 교구청에서 생활할 때,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님이신 고(故)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미식축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교님께서는 너무나 신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위해 친절한 설명도 계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런 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르면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모르면 신앙이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신앙이 지루하다면서 주님을 멀리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계속 모르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면서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서 부모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그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이 말에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한 자녀를 혼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보통은 가족 모두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 성가정이라고 하지만, 더 큰 의미를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과연 성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로를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사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세상이 몰라주는 죽음이라고 그 삶이 잘못 산 것은 아니다.
- 호라티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도 가정 안에서 성장하십니다. 성가정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복음의 소명입니다. 성가정이 주는 평화와 행복은 서로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과 사랑은 어우러지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어우러지는 사랑의 조화는 진실한 대화와 개방된 대화에서 비롯됩니다. 있어야 할 사랑의 시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저마다의 가정에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주는 성숙함을 보여주십니다. 성숙함이란 몸으로 살아내는 진실함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아 주시는 진실하신 요셉과 마리아가 계십니다. 복음의 씨앗은 성가정에서 시작합니다. 또한 성가정을 더 단단하게 묶을 수 있는 것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기도가 사람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성가정이라는 가장 좋은 공동체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감사의 축일 되십시오. 성장은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며 질서의 중심에는 성장하는 성가정이 있습니다.
성가정을 살리는 것은 대화입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입은 하나고 귀는 둘입니다. 잘 듣는 것이 잘 사랑하는 성가정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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