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라 불리리라.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2024년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생중계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25일
성탄절 낮미사 생중계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2,7-10)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 2독서
(히브 1,1-6)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이사 52,7-10
오늘 제1독서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히브 1,1-6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네. 민족들아, 어서 와 주님을 경배하여라. 오늘 큰 빛이 땅 위에 내린다.
요한 1,1-18
오늘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명동성당
성탄절 낮미사 생중계
2024년 12월 25일
명동성당 12:00
주님성탄대축일 낮미사 생중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평화방송
성탄절 낮미사
2024년 12월 25일
강수근 바오로마리아 신부
✚ 주님 성탄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5
✚ 강론시작 18:36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창조 전, ‘한처음’에 세상은 ‘어둠’과 ‘무질서’와 ‘공허’ 속이었습니다(창세 1,2 참조). 그런데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1,3) 하시자, 사람이 전혀 살 수 없던 상태가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상태로 바뀝니다. 하느님 말씀은 ‘생명의 질서’를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직역하면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또는 안에) 천막을 치셨다.’입니다. ‘살이 되셨다.’는 예수님의 육화를 뜻합니다. 그리고 ‘천막을 치셨다.’라는 표현은 탈출기에 나오는 ‘성막’을 떠오르게 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이 어디를 가든지 그들과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천막’을 치셨고, “세상 끝 날까지”(마태 28,20)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우리 삶의 자리가 구세주 예수님께서 거처하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삶의 여정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 있는 구원의 역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신비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구유에 누워 계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빛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제 12월 24일 대림절 마지막 독서의 기도를 하다가 아오스딩 성인의 다음 말씀이 성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죽은 채로 있었을 겁니다. 그분이 죄 많은 인간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육신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그분이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이 당해야 할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생명을 다시 얻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되었을까 전에 나눈 적이 이미 한 번 있지만 오늘도 또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이번에 해봤습니다. 주님 오심이 왜 내게 기쁨인지.
남의 집 아들이 태어나면 그 집 부모가 기쁘지 제가 기쁠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성탄이 제게 기쁨이 되려면 주님과 제가 특별한 관계여야 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특별한 분이시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십을 전후해서 저는 사느냐 죽느냐 고민했습니다.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이 악한 세상을 고통스럽게 꾸역꾸역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어설펐지만,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고, 내가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고 더 살고 싶지도 않은 생을 살게 하신 하느님을 만나야만 했고 살아야 할 이유를 하느님께 찾아야만 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무신론자로 살았거나 종교를 가졌더라도 불교나 유교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 불교나 유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설명해줘도 왜 살아야 하는지까지는 설명해주지 못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셨기에 그리스도교가 생겨났고, 그리스도교를 믿었기에 하느님을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은 물론 수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란치스칸 수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제가 수도자도 프란치스칸도 아니라면 제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되었을까요? 지금 와서 프란치스칸도 수도자도 아닌 제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오심은 제 성소의 근원입니다.
주님께서 프란치스코를 부르시어 은사를 주지 않으셨으면, 내 입맛에 맞게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맛 들이게 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행복했더라도 지금만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참 행복을 배우지 못해,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고 불행했을 겁니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소유케 하는 가난에 관한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고통도 사랑하고 죽음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참으로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불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탄은 그것이잖아요?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심으로 우리는 올라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는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잖아요?
이 밖에도 할 얘기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오심이 여러분에게 진정 기쁨과 행복이기를 바라고 빕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일부터 1월 5일까지 새로운 강론은 올리지 않고, 전에 올렸던 강론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 올리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과 기쁨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기쁜 날이라고 말들 하지만, 참으로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 역사 안에서 둘도 없는 당혹스럽고 황당한, 신비롭고 믿기지 않는 대체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날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일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는 두 가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앞의 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이 사람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뜻으로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을 지닌 사람의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밝혀줍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그리고 이에 대한 초대교회의 찬미가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밝혀줍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이처럼, 예수님의 강생은 하느님 사랑의 표징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같이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분이 높은 이의 영예는 전혀 손상을 받지 않지만, 신분이 낮은 이는 자신의 비천함에서 들어 올려 진다.”
이는 마치 정약종이 <주교요지>에서 ‘임금이 신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에 비유한 것과 같습니다. 곧 임금이 신하의 딸과 혼인한다고 해서 임금의 신분은 낮아지지 않지만, 신하의 딸은 왕비의 신분으로 격상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살이 말씀에 덧붙여져 썩어 없어질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일, 사람이 드높아진 일, 곧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곧 거처를 사람인 우리 가운데 두고 우리와 함께 사람으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천막(장막)’이란 당신의 임재와 현존을 상징합니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성막은 이제 하느님께서 산 위에가 아니라, ‘하느님이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렀듯이, 이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유대 랍비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표현대로 ‘성막’이 공간 속의 성소이고 ‘안식일’이 시간 속의 성소라면, 이제 ‘사람’이 하느님의 성소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그러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러기에,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어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나아가서는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가운데 사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함께 거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의 공동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벌이는 ‘사랑’입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 사랑의 행위가 바로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극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비우시니 우리도 비워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져야 할 일입니다.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랑과 기쁨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주님!
오늘 제가 빛을 입었으니,
일어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을 꽃피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저도 따라 내려가게 하소서.
당신께서 비우시니,
저도 비우게 하소서.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저도 가난해지게 하소서.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처럼 될 것을 믿지 않으면 구하러 내려가지 않는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께서 내려오신 이유는 우리를 올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둠에 속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이들이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높여줄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루마니아의 14세 소년 크리스티안 마리안 베키아노(Christian Marian Vecchiano)의 이 이야기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를 보여줍니다. 아주 좁은 우물 파이프에 세 살 아기가 버려진 우물에 빠졌습니다. 구조대가 도착하였지만, 아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물 입구가 30cm로 어른은 들어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아기는 줄을 붙잡고 올라올 수도 없었습니다. 깊이가 15m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이프를 깨면 아기 생명이 위험했습니다. 굴착기로 11시간 동안 팠지만, 15m 깊이까지 주위를 파며 내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모여있는 이곳을 구경하러 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다리를 묶고 거꾸로 내려가 아기를 잡고 올라오겠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어른들은 말렸지만, 그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둡고 좁은 통로로 내려가 아기를 데리고 올라옵니다.
부모는 기뻤고 크리스티안도 행복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마을의 영웅이자 루마니아의 영웅이 되었고 현재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잘살고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은 이 일로 국가의 보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땅의 어둠으로 사람이 되어 내려오셨다면 분명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면, 인간도 당신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1-12)
그런데 누가 하느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아들일까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만큼 자신도 올라갈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고 하늘에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에만 갇혀있어야 하는 존재라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위해 이 어둠 속까지 내려와야 하셨을까요? 가톨릭 교리서(460항)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야기를 많이 봅니다.
또 난간에 걸린 아기를 목숨을 걸고 구한 영웅들도 많습니다. 이수연 씨는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남의 나라 땅에서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도우려다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었던 것은 하나뿐입니다.
‘나도 살 수 있고, 저들도 나처럼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구함으로써 자신이 사는 곳에 살 자격을 얻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에 한 불법 체류자가 5층 높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가 아기를 구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를 프랑스에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시민으로 삼고 직장도 구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낳을 수 있어야 살 자격도 얻습니다.
6살 워커라는 아이는 4살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얼굴에 90바늘을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셰퍼드와 싸웠습니다. 이는 자신도 회복될 수 있고 여동생도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의 일원이 될 자격을 스스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동의하여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착한 뜻’이라고 합니다. 아기가 무엇보다 엄마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처럼, 우리도 창조자 하느님 구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착한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종종 희망이 없다면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함께하기보다 혼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희망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내일을 살아갈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야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암 투병 중에 계신 분을 많이 만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보았고, 오히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요? 끝까지 희망을 품었던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만이 또 실제로 건강도 찾으셨습니다.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작은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고 별것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면, 점차 절망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젊은 아빠가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저를 보며 ‘아빠’라고 했어요. 눈물 날 정도로 기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대단한 것일까요? 세계 신기록에 등록될 정도로 유일한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이처럼 작은 것에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냥 ‘없다’라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희망의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순히 이 땅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힘없고 연약한 아기의 몸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없어집니다. 얼굴만 봐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기가 말을 하지 못해도, 아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기와 함께 할 미래를 떠올리면서 더 큰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아기의 몸이지만, 그 자체로 커다란 희망이었습니다. 거부감 없이 당신을 받아들이라고,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쁨과 행복을 간직하라고,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떠나 근본적인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희망의 시작은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풍날, 여행 날, 합격발표날, 소중한 손님의 방문 날 등….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설레임에 더 기뻤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은 젊을 때 결혼하여 살아온 늙은 배우자이다.
- 탈무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우리 시대의 성탄은 복된 희망의 성탄입니다. 가장 좋은 성탄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여기 이곳도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여기 이곳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만드십니다.
성탄을 몰라도 성탄은 우리에게 옵니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묻는 은총의 성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십니다.
더 나아지길 바라시며 하느님께서 여기 이곳에 탄생하십니다. 다투지 않으며 하느님 먼저 작아지십니다. 작은 아기가 되시어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떠받드십니다. 조금씩 알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피와 살이 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성탄이 가장 좋은 복음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뜨겁게 만나는 고마운 성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성탄은 우리와 더욱 가까워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12/2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8 |
---|---|
24/12/2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7 |
24/12/2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6 |
24/12/24 (화) 성탄절 밤미사 생중계 (0) | 2024.12.24 |
24/12/2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4 |
24/12/2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3 |
24/12/2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2.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