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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2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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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2025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2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히브 9,15.24-28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 3,22-30
오늘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27일
신윤민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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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악마는 존재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이를 본 율법 학자들이 말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무엇 때문입니까? 시기심과 적대감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 두 눈으로 은혜로움과 기적을 보고도 마음이 불편해지고 꼬여서 진실을 외면하며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는 그들이 퍼뜨리는 거짓이 얼마나 허황되고 억지스러운지를 깨닫도록 차근히 설명하십니다. 그들을 모두 구원하시고 싶은 것이지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3-25).

마귀(악마)는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악마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거스르게 하는 유혹자 또는 허공을 떠도는 공중의 악한 세력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거나, 그와 반대로 위축되고 나약한 이들의 마음을 병들고 악한 생각으로 꼬드겨 그들의 몸과 입을 빌려 힘을 행사하는 것이 주된 수법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장악하여 불쏘시개처럼 한바탕 사용하고는 버리지요.

그 악마의 힘이 대단해 보여도 빛이신 예수님께 그들의 꼬임이 통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 힘센 자를 묶어 놓고 그에게 사로잡힌 이를 구출해 내실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은 누군가를 장악하여 지배하고 조종하지 않습니다. 그가 참으로 자기 모습대로 살게 해 줍니다. 시기심과 거짓말에 자신을 맡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 향하고, 또 기쁨과 감사와 기도에 맞추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죽음보다 두려운 고통 가운데에서 사랑하기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요즘 제가 가끔 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제가 몇 살 때까지 사랑할까, 사랑하다가 죽고 사랑을 위해 죽을까 하는 것인데 오늘 히브리서가 다시 이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정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어려서는 이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뜻으로 전신을 기증했는데 하지만 그것으로 진정 죽는 순간까지 사랑했다고, 사랑을 위해 나를 바쳤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20대에 전신을 기증했으니 그것은 20대의 사랑이지 죽을 때까지의 사랑이 아니고 죽을 때의 사랑도 아닙니다. 더욱이 전신 기증은 몸뚱이의 기증이지 저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좀 더 의미 있게 하려는 것이지 진정 저를 바치는 것이 아니며 큰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겠습니다. 

지금 저는 죽음이 두렵고 걱정되는 것보다 죽기까지 겪게 될 고통이 더 두렵고 더 걱정됩니다. 그렇지요. 죽음보다 두려운 고통입니다. 

이것은 저뿐 아니고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사랑이 없다면 고통이 죽음보다 두렵고, 사랑이 있어도 사랑이 고통보다 작으면 고통이 죽음보다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끝날 날만 기다리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 같거나 쉬이 오지 않을 것 같으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삶을 포기하는데 그것이 소위 자살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사랑해도 고통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게 하고 사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왜냐면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사도 요한의 말처럼 참사랑은 두려움을 무릅쓰는 힘이고 몰아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힘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육체의 힘이 쇠하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지치면서 같이 쇠하지 않을까 걱정이고 그래서 고통과 두려움에 갇히거나 매이지 않을까 걱정이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그것들을 바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걱정이나 하고 있으면 될까요? 첫째는 꺾이지 않는 정신이고, 둘째는 불굴의 정신으로 실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반복하여 힘을 쌓는 것입니다. 고통과 두려움의 실제 상황에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신력으로 사랑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늙으면 육체의 힘과 함께 사랑의 힘도 빠질 거라는 패배주의, 그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령을 모독하는 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3,29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주님!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를 모독한 자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까?

오늘 율법 학자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듭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과 악령을 구분할까요? 진짜 부모가 주는 것과 가짜가 주는 것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평화’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착하게 자라 세상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안’을 준다면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오는 영이 아닙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가장 완전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마귀가 나간 존재들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도 율법 학자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은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초대’와 같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별들은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성령도 그러한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성령과 같습니다. 이 초대장을 거부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초대장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아들이 회개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회개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기 어렵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그 양심은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만드는 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들어주며 음식도 흘리지 않게 먹게 되고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여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양심 때문에 지옥에도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무조건 양심이 발현하여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거짓말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양심을 속이는 일을 종종 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초대까지 거부하거나, 심지어 그 초대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양심상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하느님의 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차라리 그분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지옥에 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갈등 구조는 전과자 장 발장과, 법과 정의를 절대시하는 경찰관 자베르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됩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자비로 새 삶을 살게 되고, 자베르는 “범죄자는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믿으며 장 발장을 악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시가전 중 자베르가 위기에 처하자 장 발장은 복수 대신 “이 사람이 악령인지, 혹은 진정한 선인지”를 고민하던 그를 살려 주어, 오히려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자베르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합니다. “악이라고 믿었던 자가 선행을 한다면, 내가 믿어 온 법과 정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양심의 충돌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절대적 틀을 무너뜨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마르코 3,29)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악령’으로 치부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초대를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절망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것과도 닮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용서가 찾아왔음에도 스스로를 옭아매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자베르의 비극이며, 이는 성령을 거부하는 영혼의 파멸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가 됩니다.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보 1호 숭례문을 방화한 사람은 다시 잘살아 보자는 나라의 초대에 응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을까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용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어서 세상에 다시 나오더라도 자신이 움츠러들어 온전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여성 인권 주의자는 왜 하느님이 남성이어야 하며 성체를 불로 태우고 성체에 욕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오늘 복음대로 하면 그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자신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한 성체를 계속 받아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한 번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계속 당신 피의 용서로 부르십니다. 성령은 “내가 너의 부모야!”라고 하는 부모의 피가 섞인 초대장입니다. 부모를 만나는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여러 번의 초대를 계속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초대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이기에 나중에 양심이 하느님의 마지막 초대에 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양심을 우리 안에서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양심상 되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유갑의 글씨

모든 것이 풍요로우면 감사하기 힘듭니다. 당연한 것, 당연히 자기가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한 달 피정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침묵 피정으로 오로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이 중요했습니다. 어떤 책도 가져갈 수 없고, 성경책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습니다.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기도하면서 큰 편안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와 묵상 중에 분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피정이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세상 소식과 완전히 끊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성경책 외에 어떤 책도 볼 수 없음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때 우유를 마시다가 우유갑에 쓰여 있는 글씨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글씨가 우유갑 곳곳에 쓰여 있었습니다. 우유 마시는 것만 신경 쓰다 보니 우유갑 글씨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세상만 바라보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세상 곳곳에 새겨져 있는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없습니다.
 
피정 때, 우유갑의 글씨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감사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풍요로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가득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선포를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자기들과 다른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득권만을 누리려는 교만의 마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지고, 세상 안에서만 살려고 하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면 찰수록 주님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진짜 잘 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진정한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야망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것을 막을 사람이 없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 찰스 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율법 학자들의 모함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모순된 율법 학자들의 논리를 끝장나는 사탄의 궤멸로 모함과 고발을 조용하게 하십니다. 분쟁과 분열로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고독이 성령을 향하십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함부로 모독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권위를 빌어 사랑과 용서가 끝내 승리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힘과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새로운 질서인 구원과 해방을 이끌어 내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강자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으십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과 용서로 지탱하는 나라입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진리와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입니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파괴하는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맑은 길을 제시합니다. 맑은 길을 맑은 마음으로 나누는 행복한 설연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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