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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2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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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하느님, 복된 토마스를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로 세워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삶을 본받게 하소서.

2025년 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2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히브 10,1-10)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오늘 말씀 카드
    (히브 10,9)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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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 10,1-10
오늘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마르 3,31-35
오늘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28일
강규원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9

✚ 강론시작 09:22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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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기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마와 치유의 기원에 악이, 그것도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속성과 구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 그럴듯하면 그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 확신하게 됩니다. 

그들이 매우 똑똑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똑똑한 이들도 예외가 되지 않는 ‘거짓말의 신비’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거짓된 이해와 비난이 가족과 친척들조차 장악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들은 것만 가지고 예수님더러 미쳤다고, 마귀가 들렸다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혈연관계라고 해서 죄와 악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 교회의 일원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악이 저절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과 죄악의 덫에 걸려 비참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 자비를 향하여 두 손을 뻗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용서와 사랑, 구원과 치유를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응답하며 걸어갈 때 우리는 빛 안에서 거듭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사뭇 잘못 알고 있다는 뜻에서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한 다음 하느님 뜻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우리의 오해를 정정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당신 형제요 어머니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묵상코자 합니다. 이것을 우리 부모 자식의 관계에 빗대어 이해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부모가 제일 원하는 것은 고작 옷이나 먹을 것을 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옷을 가지고 오는 것보다 자식이 손주와 함께 오는 것을 원하고, 돈이나 옷보다 당신 뜻을 따르기를 더 원합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작 돈이나 옷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제 뜻에 함께하는 동지(同志)를 더 원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옷을 선물하는 분보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의 취지에 동감하고 그 활동을 같이하는 동지가 더 낫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곧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원하시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 동물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 곧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곧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시지만 실은 우리에게 당신 전부를 바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 우리 자신을 몽땅 바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프란치스코의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서로를 바치는 것, 그래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 이것을 제사라고도 하고 봉헌이라고도 하지만 실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을 실천할 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한 주님의 어머니들이 된다고 하시는 오늘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3,33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난 아침, 파도에 휩쓸려온 불가사리가 해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습니다. 해변을 걷던 어린 여자아이는 불가사리를 하나 집어 바다로 던졌습니다. 또 하나를 주워 그것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꼬마야! 지금 뭐하니?”
 
“불가사리를 바다로 돌려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얘야, 이 해변에는 수십만은 못 되더라도 수만 마리나 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단다. 네가 몇 마리 구해준다고 별 차이가 있겠니?”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사리를 또 집어서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쟤한테는 큰 차이가 있죠.”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하나로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냐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서로 이야기하지만, 나 혼자만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 실천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사랑을 실천한다고 누가 알아주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시작하는 사랑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 인류가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의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알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미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물학적 가족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서 새로운 가족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의 뜻을, 즉 사랑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역전되고 맙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있다

- 비스마르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우리의 가족도 하느님의 뜻과 실행을 만나야 거칠어진 곳들이 다듬어지며 더 소중한 관계가 됩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하느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실행속에 큰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살리는 것이 참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서로를 향한 축복이 되고 참된 실행은 서로를 위하는 구원이 됩니다. 혈육이 혈육의 관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소중한 스승이 되길 바라십니다.

반성하는 가족은 하느님의 뜻과 함께합니다. 한솥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정한 나눔입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하느님의 뜻이 있었고 뜻을 실행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만나는 뜻깊은 설연휴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족은 먼저 하느님을 향하도록 기도하고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먼저 해야할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고 실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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