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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2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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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2025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2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느헤 8,2-4ㄱ.5-6.8-10)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 제 2독서
    (1코린 12,12-30)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4; 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오늘 말씀 카드
    (느헤 8,10))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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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 8,2-4ㄱ.5-6.8-10
오늘 제1독서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 무렵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1코린 12,12-30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1-4; 4,14-21
오늘 복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26일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정성환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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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복음서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이름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모든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적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고자 한 것이지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실재가 있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한 복음 선포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점차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여러 단편적인 구두 전승을 모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님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복음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선언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시요 구세주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과 눈먼 이들, 무엇인가에 붙잡혀 묶이고 억압받던 이들이 구원과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많은 이가 주님의 은혜로움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를 보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율법이 참되다고 고백합니다. 

모진 고생을 통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구약과 신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오늘도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만족을 찾는 사람 구원을 찾는 사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선포하는 사람 측면에서 생각해봤는데 선포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포해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포자가 자기 말을 하면 성경 말씀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데 어떻게 자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말을 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은 성경이지만 선포하려고 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자기 말인 경우입니다.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논쟁할 때 권위자도 자기와 같은 말을 했다는 식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며 자기 말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 말씀이 자기 말이라는 식 말입니다. 

또 자기 말을 하려고 함은 아니지만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들어내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멋진 강론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칭찬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나는 없고, 내가 주님이 되어서 또는 내가 주님인 듯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처럼 성령을 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는 이사야서 부분을 읽으시는데 이것을 볼 때 성경 말씀은 주님의 영에 의한 선포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듣는 사람도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을 듣는 사람이거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들은 다음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알아듣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아니고 구원을 찾는 이들이고, 구원을 찾는 이라야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만족을 찾는 이들은 굳이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을 겁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달콤한 말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다가 비 구원의 상태에 처했을 때야 찾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족은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만족이 더 달콤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나는 가난한가? 
부유한가? 
나는 만족을 찾는 사람인가?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백년 전경에 이스라엘은 암흑기였습니다. 네브가드네사르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유배는 단지 나라와 땅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 삶의 지주가 되었던 율법과 성전과 사제를 모두 잃어버린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유다인들은 이스라엘로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술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아에 의해 성전재건과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들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고, 사제 에즈라에 의해 모세의 율법서가 읽혀지고,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이처럼, 모세의 율법이 구약시대의 민족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면,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의 구심점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코린 12,12)

우리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 어떤 차별이 없는 한 형제임을 말합니다. 곧 성령께서는 각자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하나를 이루어 일치를 이루는 풍요로움을 주셨습니다. 

곧 서로의 다름은 잘못되었거나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를 드러낼 뿐이며, 오히려 상호보완과 풍요로움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마치 눈과 손이 서로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의 지체들을 각각의 용도에 맞게 한 몸 안에 만들어 놓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걸맞은 품성을 유지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말씀’의 선포를, <제2독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복음>은 말씀의 성취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아서>에서는 말한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헤 8,3)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이처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포하신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렸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는 오실 메시아, 곧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될 메시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자,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맞서 돌아섰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다음 주일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오늘”은 <루카복음> 전체를 통해 일관된 구원의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렛 성전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 20)고 선언하시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주님의 천사는 목동들에게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고 선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하시고, 십자가에서 도둑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하느님 면전에서 대면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의 때로 말입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손에 쥔 유일한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존재 여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재산은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규칙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수간이며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은 하느님의 전령입니다.”(171항)

그러니 오늘 우리는 시편작가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 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의 본질 : 유산 상속자를 가려내는 조건

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가 예언된 이사야서를 찾아 읽으시고는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온 삶은 아버지로부터 예언된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라이언 벨 목사는 ‘말씀만으로’라는 개신교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기도를 삶으로 사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도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하느님 없이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1년 동안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선언합니다.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으로 설교도 하던 사람이 왜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말씀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은 자녀의 말을 부모가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기가 울면 아기의 울음을 부모는 해석합니다. 배고파서 우는지, 싸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그러나 아기는 부모의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학교 가라고 하면 그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그래야 자녀입니다. 

영화 ‘프루프’는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시선이 그려집니다. 동생 캐서린은 비록 정신질환인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5년 동안 수학에만 미쳐있는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반면 언니 클레어는 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돈을 버는 데 바빴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은 아버지가 훌륭한 수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학을 배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캐서린은 아버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동안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단지 미친 사람이 아닌 위대한 수학자였음을 드러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을 통해 실현하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해석해버리고 맙니다. 아버지가 미쳐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쓸모없는 땅을 팔아서 술을 마십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끝까지 파헤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건강해집니다. 혹시 이것이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땅을 파다 보니 땅이 기름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씨를 뿌렸더니 다른 밭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어 아버지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유산을 받을 자격을 말씀을 성취하며 증명하는 자녀의 자세입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읽어도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십일조가 아닐까?’라는 생각하고는 가톨릭에서는 이미 말하고 있지 않은 십일조를 혼자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생 때부터 돈이 부족한 적이 없습니다. 신학생 때 유학 가면 1년에 책 사라고 용돈을 3,000달러를 받는데, 저는 1,000달러가 없어져도 없어진 줄 몰랐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아버지로 체험하고 또 하느님 자녀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증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최고의 선물’(2006)에서는 엄청난 부자인 할아버지가 망나니 손자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12가지 임무를 부여합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라는 것, 진정한 친구를 사귀라는 것 등입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니 돈의 소중함을 알겠고, 친구를 사귀어보니 돈이 친구를 위해 쓰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모든 유산을 몸이 아픈 친구를 위해 씁니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사실 더 있었습니다. 손자가 그 유산을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쓸 때 더 주도록 해 놓았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예언입니다. 성취하여 상속받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일찍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제게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명연이는 조용하고 집중을 잘하니까 커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의 이 예언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저는 과학과 전혀 거리가 먼 가톨릭 신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말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마지막이라며 눈물 쏟으며 인사하면서 들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기억하는 말씀이었지만,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과학보다 신학이 더 좋았고, 세상일보다는 주님 곁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판단한다는 이유로 바뀐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판단일 뿐이기에 그렇게 살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흔들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판단보다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의 판단보다는 세상의 판단을 따르려고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했습니다. 당시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목수로 사는 것이 당시 세상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18.19)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루카 1,21).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오늘, 곧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현존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은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순간, 기뻐하셨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죄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수난과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느님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못 본 척합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쫓는 길이 아닌, 하느님을 쫓는 길. 이 길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엔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현실 안에 살아 숨쉬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있기에 우리의 내일이 있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말씀으로 오늘 이 아침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말씀 없는 오늘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안고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오늘입니다.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떨어지고 멀어진 거리가 바로 사랑의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멀어진 거리를 이어주십니다. 오늘을 되살리시는 말씀이 되십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살아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말씀의 가득찬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도 이루어져야 할 말씀의 삶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깊이 새기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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