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4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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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필레 7-20)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7,21)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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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레 7-20
오늘 제1독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7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9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19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
그렇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루카 17,20-25
오늘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4일
한용희 대건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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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1독서에서 봉독되는 필레몬서는 한 장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입니다. 부유한 신자 필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스가 도망쳤다가 바오로 사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오로를 통하여 입교하였고, 옥중에 있는 바오로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 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의 안전을 생각하여 그를 다시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필레몬에게 편지로 오네시모스가 노예로서 지은 죄를 용서하고 신앙의 형제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바오로는 신앙의 지도자로서 필레몬에게 요구할 권위가 있음에도,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필레 14절).
바오로가 이 두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쓴 방식은 권위로 지시하기보다 필레몬의 성숙한 신앙과 애덕을 믿으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필레몬에게 입힌 손해를 자신이 직접 갚아 주기로 합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가 필레몬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사람 사이를 섬세하게 중재하는 바오로의 모습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이 사건을 다시 보며, 그들 안에 있는 성숙한 신앙과 애덕에 기대야 합니다.
권위적인 지시보다, 선의를 움직이게 하는 부탁과 제안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손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중재자의 희생적인 행위도 화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가 있지 않는다면
세상이 아주 어지러울 때 난리, 난리 해도 이런 난리 없다고들 하는데 요즘 우리 사회가 이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볼 때의 저는 오히려 냉정하고 침착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냉정해지려고 하고 침착해지려고 합니다. 너무 난리 법석을 떨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저는 꽤나 교만하고 신앙적인 자존심이랄까 자부심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이 수도자라면 다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조금 다른 뜻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분노로 거리로 나설 때 우리는 감정에 휩쓸려, 특히 분노의 감정과 파괴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서서는 안 되고 사람들이 두려워 나서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가 나서야 하며 사람들이 절망할 때 그때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우리의 희망을 두고 믿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이 ‘이게 나라냐?!’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이것이 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번번이 이런 지도자를 뽑을 것이고 나라는 이 모양이 될 것입니다.
이번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을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전 세계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설마설마했는데 트럼프를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인 히틀러를 뽑았듯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라도 이런 선출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정말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지, 복음의 가르침에 그 어떤 것보다 가치를 두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8년 전 그러니까 2016년에 제가 한 강론의 요약입니다. 수평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8년 전과 올해가 너무 똑같지요? 그래서 마치 올해 강론이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으셨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있지 않으면 이런 어리석음이 반복 또 반복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어도 우리가 그 나라에 있지 않고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이 세상에 있으면 또 그리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느냐?”고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허튼소리나 하는 것은 아닙니까? ‘이미’ 와 있는데 ‘언제’ 오느냐고 묻고, ‘여기’에 있는데 ‘다른 어디’서 오는 것처럼 묻고 있으니 허튼소리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듯 살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살면 됩니다.
쉽지 않지요.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아예 제쳐놓지는 말아야 합니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지향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완성을 향해 차츰 나아가는 것이 우리 믿음 생활이고, 종말론적인 완성을 나이 먹을수록 살아가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21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째서 외적 행복이 늘어날수록 내적 행복이 줄어들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착각하였습니다. 외적인 행복의 나라를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외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뤄지는 의로움과 마음의 기쁨과 평화라고 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 때 느끼는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행복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낀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성령으로 느끼는 행복을 맛보면 세상의 행복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고는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멸시의 고통만을 찾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외적인 행복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세상의 행복과 반비례하는 것일까요? 마음의 행복도 느끼며 육체의 행복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을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두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사랑’ 때문에 오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연인이 상대가 아무리 목숨을 바쳐 나를 사랑해준다고 하더라도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상대의 진심 때문에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연인이 주는 행복을 완전하게 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성으로부터 오는 행복은 완전하게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영화 ‘위대한 캐츠비’에서 캐츠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데이지는 다른 행복을 끊을 줄 몰랐습니다. 캐츠비는 어렸을 때 데이지를 사랑했지만, 데이지는 돈과 명예도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캐츠비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데이지는 이미 돈과 명예는 있지만, 바람둥이인 톰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톰은 자기 적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윤리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고 데이지도 어느 정도 이것을 압니다.
캐츠비는 데이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가지고 있는 허울뿐인 행복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자기 남편의 내연녀를 차로 죽이기까지 합니다.
캐츠비는 그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데이지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랑에 온전히 몸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완전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가 이와 같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행복을 신에게 맡겼습니다. 신이 전능하고 완전한 사랑임을 알기에 그는 유일하게 가진 두레박도 개가 입으로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버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상의 모든 땅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공허하였습니다. 자기를 믿으니 그만큼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신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 주인공 파홈은 욕심을 부리다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그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추장의 말에 그는 돌아올 시간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2미터도 안 되는 땅에 묻혔습니다. 자기를 믿으면 그만큼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시작은 선악과, 곧 십일조를 바치므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행복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을 끊는 만큼 더 완전한 사랑이 주는 행복을 누리게 됨을 의심하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제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늘 망설입니다. 좋은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딱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선택합니다.
‘토지’는 박경리 선생님께서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집필하는 데만 무려 25년이 걸린 대하소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토지’ 1부를 연재 중이던 1971년 8월에 암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셨습니다. 병마와 싸우며 작품을 연재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집필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토지’의 서문에 나오듯이, 목숨이 있는 이상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면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쓴 글이기에 대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 없이 자란 포도는 훌륭한 포도주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척박한 땅에서 자라야 스스로 뿌리를 깊이 내리면서 진짜 좋은 포도주를 키우지 않습니까?
고통을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유익함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유익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에 좌절하고 실패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우리에게 모범을 주시는 주님께서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큰 고통이 부활의 기쁨으로 바뀜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고통 너머에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희망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시지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에 맞춰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 때문에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굳게 믿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은 고통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 너머에 하느님 나라라는 큰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선물을 주십니다. 앞서 박경리 선생님께서 고통을 마주하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고통의 유익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마지막 날 주님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열리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의 눈으로 만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외형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예수님의 고귀한 마음을 만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갈망을 채워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서로의 삶에 진정한 생기를 주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더더욱 하느님 안에서는 진실한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커지면 공간도 환해집니다.
마음이 그려가가는 십자가와 부활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한데 모여 삽니다. 마음도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마음이 성장합니다. 고난과 배척으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분명해집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향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면 이쪽 저쪽 여기 저기가 아니라 우리자신의 마음을 먼저 성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회개를 낳고 예수님의 배척은 복음을 낳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향합니다. 우리마음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제 어디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복음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향하는 복음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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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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