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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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다니 12,1-3)
그 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 제 2독서
(히브 10,11-14.18)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13,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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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다니 12,1-3
오늘 제1독서
그 때에 네 백성은 구원을 받으리라.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히브 10,11-14.18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11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13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14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마르 13,24-32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25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26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7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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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시작 01:24
✚ 강론시작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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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그리스도와 가난
교회는 오늘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기념하며, 가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난한 이들과 깊은 형제애를 나누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와 가난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가난하게 되시어(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습니다(루카 4,18; 19,10 참조).
교회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바로 전 주일에 기념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가난의 깊은 관련성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가난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참되게 거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헐벗고 모든 것을 빼앗긴 십자가의 가난에서 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시면서 가장 낮은 자로서 세상을 섬기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한다고 천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가 되셨듯이 교회도 비우고 버려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 활동에 참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8항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난을 자기 것으로 할 때,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기며 보호와 도움을 구하는 이웃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책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난을 간직할 때 시작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종말과 심판의 때가 옴을 얘기합니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누구나 죽듯 종말은 누구에게나 오고 심판도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오늘 주일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런 묵상을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오늘 것은 종말인가? 주님인가? 이쯤 얘기하면 이미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잡히시겠지요?
많은 사람이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생을 끝냅니다. 그렇게 많은 죽음을 보면서도 자기의 끝은 멀리 있는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종말이 임박해 있음을 보지 못하거나 종말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무관심한 것입니다.
무관심이란 말이 그렇지 않습니까? ‘관한 마음이 없는 것’이 무관심인데 죽음에 관한 마음은 없는 것이지요.
다르게 얘기하면 무관심이란 죽음에 관해 진심이 없거나 진심이 아닌데 인간이 어찌 죽음에 관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안 볼 수 없는 인간이 아닙니까?
강 건너 불 보듯이 하지만 실은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거나 보면서도 못 본 체하거나 정면으로 직면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러다가 나이 먹어서 또는 병이 들어서, 서서히 또는 갑자기 직면하게 되는 것이고, 죽음이 덜컥 내 앞에 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죽음이 이렇게 덜컥 오는데 신앙인은 어떻게 다릅니까? 죽음이 안 옵니까? 죽음이 덜컥 오지 않고 부드럽게 옵니까?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런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죽음이 오지 않고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죽음과 함께 주님께서 오시거나 오늘 주님 말씀처럼 종말의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도’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나도 그리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는 표현이며, 신앙인인 우리도 예외 없이 종말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문 가까이 온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덜컥 문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던 주님께서 오셔서 부드럽게 문 두드리시는 것을 듣고는, 주님은 기쁘게, 죽음은 차분하게 맞이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마음 읽기
낙엽이 우수수 지는 11월의 늦가을은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도 그 자체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는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발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3,28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주님!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 입니다.
오늘의 결별에서
새롭게 변형되게 하소서.
오늘의 죽음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종말의 법칙 : 죽음의 법칙을 알면 생존 법칙도 보인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적어도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은 생각하기 싫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묵상할수록 더 오래 살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멸망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우선 세상의 한때 잘 나갔다가 망하게 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들에게서도 분명 태양과 달, 별이 빛을 잃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먼저 한때 휴대전화 분야의 글로벌 리더였던 노키아 제국의 멸망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키아는 자신의 명성과 기술에 안주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애플과 구글의 터치스크린 시스템을 거부하였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더는 그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코닥의 멸망을 살펴볼까요? 코닥은 세계 카메라 필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결국 자기 이익을 갉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그 기술을 묻어버렸습니다. 다른 회사들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하고 실용화하였을 때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제품을 사주는 고객들에게 불량품을 내놓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고 호통을 치며, “아내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5년 삼성 휴대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건희 회장은 공장에서 휴대폰, 텔레비전, 팩스기 등 불량품을 모두 폐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추정 가치 약 500억 원(당시 약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만든 상품이 불타 없어지는 모습을 본 삼성 직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 이익만이 아닌 고객을 감동하게 하려는 마음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경영 합리화로 잉여를 많이 올려 궁극적으로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며 사회적 의무다.”(1976년 언론기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면 그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익은 잊히게 됩니다. 그러면 구매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러면 망하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처음의 관심은 고객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으로 차차 자기 이익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홍익인간, 곧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이념으로 생겼습니다. 이것이 잊힐 때는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계명을 기억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조금은 희생하면서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계명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살려면 규칙적인 화형식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셋째 날에 땅에서 나무들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존재임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해는 하루, 달은 한 달, 별은 1년 주기로 돌아옵니다. 이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가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는 하루, 한 달, 1년 주기로 규칙적인 예배 규정을 수없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무시되는 날 종말입니다. 이것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입니다.
대전 ‘성심당’을 모델로 삼읍시다. 창업자 임길순 씨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라는 정신으로 ‘성심’(예수님 마음)으로 가게명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화형식이 있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빚을 냈다가 공장에 불이 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후손들은 창업자의 홍익인간의 마음으로 시작하여 5개의 매장으로 순이익이 3,400개 대기업 파리바게뜨를 넘어섰습니다. 지금도 그분들은 성당에 나와 기도하며 하느님과 창업자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든 물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괜히 그것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파기합니다. 제 역할 수행을 위해 우리의 태양과 달과 별빛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호경으로 주님 초대하기
“오, 예수님. 거룩해진다는 건 얼마나 쉬운지요. 선의만 조금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영혼 안에서 매우 작은 선의라도 발견하시면 서둘러 당신을 영혼에게 주십니다. 그때는 영혼의 잘못도, 넘어짐도,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매우 관대하시며 아무한테도 당신 은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까지 하는 분입니다. 성덕에 이르는 지름길은 성령의 영감에 충실히 머무는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님의 일기 중 일부입니다. 성녀의 말씀처럼 성령의 은총에 힘입어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거룩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약간의 선의에도 조건이 붙으면서 주님의 활동을 가로막아 자기의 거룩함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거룩함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됩니다.
악습에 빠진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에 대한 비판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습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먼저 비판부터 하게 된 것입니다. 비판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를 위해, 비판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성호경을 그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비판이 아닌 상대방의 좋은 점을 먼저 찾게 되었습니다.
성호경으로 주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입니다. 성호경이 힘든 기도일까요? 성호경 하는데 5분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 힘들다고 인정하겠지만, 아무리 길어도 5초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까? 이 조금의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서 거룩해지게 된 것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까?
이 정도의 선의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얼마 안 있어 끔찍한 일들이 자기들 주변에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 말씀에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일이 어디서 일어날 것이며, 특히 언제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약간의 선의만으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우리의 선의를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따뜻함을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맑아져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 법정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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