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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2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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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4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2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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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에페 5,21-33
오늘 제1독서

 

둘이 한 몸을 이룸은 큰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2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3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4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26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7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8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9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30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31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32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33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루카 13,18-21
오늘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29일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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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겨자씨는 자라나고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겨자씨와 누룩은 계속 자라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복음이 점점 많은 이에게 전파되는 것이 그래도 눈에 보였을 것이고, 사도들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뒤 중세와 근대에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확장되었고, 아프리카(고대부터 복음이 전해진 지역들도 있다.)와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물론 지금도 선교 지역들이 있고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들이 있지만, 그러지 않은 곳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유럽을 보면서 성장을 말하기는 어렵고, 아시아는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통계상으로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계속 있어도 실제로 느껴지는 교회의 활기는 수십 년 전보다 못하여 보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는 자라나고 있을까요? 반죽은 부풀고 있을까요?

그런데 사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커져 가고 있을 때 필요한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게 여겨질 때 필요한 말씀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는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고, 반죽 속에 섞여 있는 누룩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래도 씨앗이 있고 누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씨앗들은 박해 속에서도 살아 있었습니다. 무관심과 실망과 불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앗들이 살아 있으니 희망을 가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오늘 겨자씨의 비유를 읽자니 전에 저희 식당에 찾아오신 할아버지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연세도 구순 가까이 되어 보였고 행색도 초라한 할아버지였는데 식사하신 뒤 보답하는 마음으로 무슨 씨앗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차로 달여 먹으면 몸에 아주 좋은 것이니 꼭 씨를 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제가 미심쩍어하는 태도를 보이며 선뜻 감사히 받지 않으니 그 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제발 믿으라고 그리고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호의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받긴 하였지만 저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오늘에서야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대비하면 저는 그 씨를 제 정원에 심지 않은 그 ‘어떤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금까지 씨를 한 번도 심지 않았습니다. 모종이나 묘목을 사서 심은 적은 많았어도 씨는 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왜 그런 사람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씨도 이렇게 심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래도 저는 여간해서는 잘 믿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특히 약이나 건강식품 같은 것은 효능이 전혀 없다고 생각진 않지만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 큰 믿음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믿을 텐데 제가 건강하기 때문이고,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않겠다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불신의 관성이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까지 불신하는 것으로 이어지면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고 오늘 주님도 말씀하시잖습니까? 보잘것없어 보이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가능성 없다고 믿는 거기에도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잖습니까?
 
씨앗이란 겨자씨만이 아니라 모두가 작고, 작지만 거기에 엄청난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씨를 심어도 나지 않을 수 있고, 자라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씨인지 모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믿고 씨를 내 정원에 심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도 무엇을 하실 수 있고, 우리 눈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느님께는 가능할 수 있지요.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능한 하느님을 믿고 오늘도 우리 정원에 가능성의 씨를 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한 쌍의 비유를 전해줍니다. 곧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루카 13,19)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그것은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아무 데나가 아니라 ‘정원’에, 그것도 “자기 정원”에 심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라는 말에서, “깃들다”는 단어의 뜻은 “밑에 거주하다” 곧 “장막에 들어가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안전하고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고 지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교회’라는 혹은 ‘가정’이라는 생명의 말씀나무에 한 둥지를 틀고 사는 새 떼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한 그루의 생명나무입니다. 당신께서 뿌려진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 사랑으로 피어난 나무입니다.  

한편,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외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누룩의 비유’는 내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들어가 자기의 능력을 전체에 돌려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반죽되어야 하고, 섞여야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에 속에 묻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 섞여서, 부풀리고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이 ‘누룩’을 우리 ‘속에’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적은 양의 ‘누룩’이 자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갈라진 우리의 내부를 통합할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룩’이 되어 세상 속으로,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이는 하늘나라의 복음은 세상을 해방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모조리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또한 “집어넣다”(εγκρυπτω)는 동사는 “숨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밀가루 서 말 속에 숨긴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오르듯이, 하늘나라도 현재 숨겨져 있는데 미래에 엄청나게 확장되리라는 전망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누룩”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겨자씨’가 이미 ‘우리’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이 이미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라는 밀가루 안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맘껏 자라나고, 맘껏 부풀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3,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주님!
사랑하는 이는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에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아지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이신 까닭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까닭에 
형제들 앞에서 
낮아지고 작아지게 하소서. 

사랑이,
제가 형제들 앞에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나라 :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잘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게 하고 잘 부풀게 해서 부드러운 빵이 되게 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 혹은 성체라 한다면 그 씨와 누룩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는 작용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휴식 같은 친구, 군고구마처럼 맛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모습을 닮아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며 자신도 행복하게 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전 제가 보좌를 할 때 중고등부 교감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왔을 때 병자성사도 주고 기도도 해 주었지만, 그 이후엔 연락을 못 했습니다. 마지막 때도 바빠서 임종 직전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동안 전화도 한 통화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정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스러워지면 나도 고통스럽고 나 때문에 누군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려면 그게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겨자씨가 뿌려질 필요가 없고 누룩이 넣어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34회에는 공부하기 싫은 11살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며 아이를 못살게 구는 엄마가 나옵니다. 엄마는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4살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엄마의 뜻이 살아있다면 자녀를 쉬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면 자기 뜻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면서 그것이 상대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고 양식이 되게 해 드려야 합니다. 

바쁘다, 바쁘다만 하고 살다가 아플 때 연락도 못 하고 그냥 떠나보낸 나에게 다시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 46,11: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이희윤 마리 스텔라 수녀님의 서울대교구 주보에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어느 날 저에게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던 자매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았는데…. 자매는 남편과 한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워 “이혼을 결정하기 전에 나와 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지…” 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그 자매의 대답이 “수녀님 늘 바쁘시잖아요.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희 일로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바빠도 난 너희가 더 중요하고, 너희가 원하면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었는데…” 하고 대답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바빠… 바빠서…” 하면서 늘 동동거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멀리서 보이면 숨이 차도록 뛰어가서 건너고, 전철이 출발할까 봐 계단을 허둥지둥 오르내리고, 빠른 환승 게이트가 어디인가 찾아보고.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바쁘게 사는 일’에 길들어있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바빠 보이는 저의 모습이 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주저하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바쁜 마음과 몸 또한 죄악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했던 연피정이 생각납니다. 지도 신부님께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녀원 밖으로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만나보고 사람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저는 천천히 걸으면서 하늘도 바라보고, 하늘 위에 흐르는 구름도 가만히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를 따라가서 짐을 함께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작은 꽃을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곁을 스쳐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멈춰 서서 그분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면 그분들은 고마워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상시와 같았다면 무심코 지나갔을 많은 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는 저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어떤 분이 “수녀님 바쁘지 않으세요?”라고 질문했을 때 제 대답은 “저요…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습니다”였습니다. 시간과 바쁨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제게 가만히 속삭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부 전선의 참호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군은 '고요한 밤'(Stille Nacht)을 부르기 시작했고, 곧 영국군도 자신들만의 캐롤을 부르며 참호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양측 군인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의 땅'에 모여 음식, 담배, 기념품 등 작은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그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까지 거행했으며, 인류애를 공유하는 이 순간에 양측은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1914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희망과 선의의 강력한 상징이 되었으며, 가장 암울한 시기에도 공유된 인간의 가치와 연결이 갈등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많은 책, 영화, 노래를 통해 기념되며 지금, 이 순간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제목의 책을 쓴 스님도 있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휴식도 되어주고 빵도 되어줍니다. 

저는 심지어 기도 시간에도 머리로는 강론 준비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하심을 알아들읍시다. 그제야 비로소 휴식 같은 생명의 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저절로 자라나고 저절로 부풀게 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인류학자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반면 사람들의 생각은 더 짧아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햇수로는 훨씬 더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생각은 짧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 사상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누구보다 길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몇 년 전, 피정 중에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다가 지금의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겨우 33년의 세상 삶을 사신 예수님보다 훨씬 더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짧은 시간을 정말로 길게 사셨습니다. 얼마나 긴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미와 영향이 이어져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이 짧아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통해 오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단순히 오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처럼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여유로움 속에서 묵묵히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를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고 이 나무의 가지에 하늘의 새들이 깃들였다고 하십니다. 사실 겨자씨는 정말로 조그마한 씨로, 유다 문학에서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이 작은 것의 상징을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정치적 의미의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서 변화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몫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 자기들을 끌고 갈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대신 스스로 사랑의 삶을 살면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듯, 또 누룩이 부풀어 오르듯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길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

- 버나드 홉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큰 나무만 보고 작은 나무는 보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소중합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모두 아름답습니다. 작아도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무 많은 성장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라나는 성장과 넓혀가는 마음의 확장 사이에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나라는 기다림과 정성의 나라입니다. 겨자씨처럼 자아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더디어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다.

 겨자씨처럼 살아도 아름답습니다. 마지막까지 밀고 나가야 할 겨자씨의 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큰 나무도 작은 나무도 모두 평등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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