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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7/0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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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7월 7일 연중 제1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7월 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7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4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2,2-5)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 제 2독서
    (2코린 12,7ㄴ-10)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오늘 말씀 카드
    (2코린 12,9)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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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 2,2-5
오늘 제1독서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2코린 12,7ㄴ-10
오늘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마르 6,1-6
오늘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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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7월 7일
정태영 멜라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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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예수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그들은 ‘목수’ 예수님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전혀 보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고정 관념’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고정 관념은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코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처럼, 믿음이 없는 마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총을 주실 수 있도록, 이미 만들어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을 깨 버립시다. 고해성사는 주일 미사를 빠질 때만 한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본당에서 봉사는 시간에 여유가 있거나 열심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부족한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사는 주일에만 간다는 고정 관념이 사라질 때, 우리의 발걸음은 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 더욱 자주 향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큰일이 생기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만 할 수 있다는 고정 관념이 깨질 때, 늘 기도하는 은총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이 시작됩니다.

믿음이 자라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스스로 정하여 놓은 신앙의 고정 관념들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신앙인이 되는 길을 선택합시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꽃이신 하느님을 보듯

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보는 것도 이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 이런 식인데 이런 경우 사람을 보기보다는 ‘어떤’을 보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을 보시지 않고 사람을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은 산이 아니고 물이며,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산이 물에 비친다고 해서 물이 산이 아니고 물 안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그런 뜻이기도 하지만 그야 말은 물과 산은 그 어떤 물과 산이기 이전에 그저 물이고 그저 산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밤을 좋아한다고 해서 밤나무가 있는 산인가, 아닌가의 관점에서 산을 본다면 밤나무가 없는 산은 내게 무의하고 그래서 거들떠보지도 않겠지요? 그러니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만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고 더 높은 차원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이니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보는 데 실패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데 실패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하고 놀라워하면서도 지혜와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못마땅합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고향에서 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수준의 말을 하고 기적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하지 못해야 하는데 자기들과 달리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향 사람들과 달리 참 신앙인이라면 무엇에서건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사람에게선 더더욱 하느님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꽃을 보는 눈도 훌륭합니다. 꽃이신 하느님을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눈도 꽤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더 훌륭합니다. 

사람을 예언자로 보는 눈은 꽤 훌륭합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더 훌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더욱더 훌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자기 삶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대부분 은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 시점을 기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전반부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기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일, 관계, 삶에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맞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누군가는 정체성에 들어갈 내용을 담아가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위쪽으로 떨어진다고 리처드 로어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위쪽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반부 삶의 태도와 접근 방식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어떤 변화도 없을 때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신체적 노화까지 오면서 점차 아래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바로 공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삶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 삶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반부의 삶에 충실하면서 공생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삶이 아닌 위쪽으로 떨어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이 먼저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놀라운 말씀과 많은 기적에도 예수님의 후반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예수님이 아닌, 과거에 살았던 예수님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모습에서 믿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지금을 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위쪽으로 떨어지는 변화도 없습니다. 세상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계속 아래쪽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변화된 많은 성인 성녀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철저하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변화를 지향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세상은 선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선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이 선한 사람이 되세요.

- 성 마더 데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적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마음을 풀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다른 마음에 묻히지 않으며 기대감이라는 마음조차 뛰어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앙은 한 차원 성숙된 삶을 매 순간 지향합니다. 

존경은 신뢰와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존중과 존경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향도 친척도 집안도 모두 지나가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존중의 마음에서 얻게되는 가장 소중한 만남이며 시간입니다.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마음의 기적 믿음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깨닫게 되는 마음의 새로운 주춧돌이 되는 기쁜 마음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기적은 존경과 존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바로 여기입니다. 존경과 존중을 우리 마음에서 다시 시작하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가장 큰 기적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의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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