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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6/0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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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2024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6월 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6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티모 2,8-15)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오늘 말씀 카드
    (2티모 8,9)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2티모 8,9)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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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티모 2,8-15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 12,28ㄱㄷ-34
오늘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6월 6일
이원빈 예로니모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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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만 없으면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십니다.” 

오늘의 서간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우리의 불성실함을 비교하는데 사실 우리는 불성실합니다. 불성실하지 않다고, 더 나아가서 성실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마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철면피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마땅히 마음이 찔려야 하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할지라도 그 성실함과 불성실함의 과녁이 올발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성실이나 불성실을 얘기하면 즉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실과 불성실을 떠올리고, 일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얘기하는 성실함은 하느님께 대한 성실함이기에 결코 일적인 성실함이 아닙니다. 

인격적 성실함이고, 사랑의 성실함이며, 그래서 어쩌면 성실함이라기보다는 정결함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께 성실함은 오늘 주님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뿐이시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남김없이 다하는 것이고, 일부를 남기지 않는 것이며, 일부를 다른 어디에 남기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은 마음이 나뉘어(분심하여) 마음 일부는 하느님께 두고 다른 일부는 사람에게 두지 않는 것이고, 힘을 다하는 것은 힘이 나뉘어 힘의 일부는 하느님 일에 쏟고 다른 일부는 자기 일에 쏟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도 하라는 주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 다 쏟으면 이웃에게 갈 사랑은 없는 것 아닙니까? 원래 이웃에게는 남기지 말고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고,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은 이웃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 없으면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하나이고, 자기만 벗어나면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나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과 나의 사람이 나뉘고,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의 일과 나의 일이 나뉘는 거지요. 

자기가 없으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도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려운 거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문제는 왜 그들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죽기 싫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청한 막시킬리아노 콜베 신부님이나 아무도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섬에 스스로 찾아 들어갔던 다미아노 신부님,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저항하다 미사 때 총 맞아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주교님 등은 사랑이 곧 목숨을 내어놓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당했을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4명의 군목(유대교, 가톨릭, 개신교)이 USAT Dorchester에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때 군인들이 구명정에 탑승하도록 도왔고, 구명조끼가 떨어지자 각자의 구명조끼를 포기했습니다. 네 명의 군목—조지 L. 폭스, 알렉산더 D. 구드, 클라크 V. 폴링, 존 P. 워싱턴—은 팔짱을 끼고 함께 기도한 후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내려갔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희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위 네 명의 군목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모든 이들은 부활의 희망을 품지 않았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입니다. 남편의 더 큰 사랑을 기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다가가는 어머니는 분명 자녀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생존부터 걱정하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걸까요? 그냥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할 뿐입니다. 

개신교의 박효진 장로는 교도관을 하면서 ‘서른 명’에 가까운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다가도 목숨 줄 앞에 놓이게 되면 오줌을 지리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자살합니다. 죽음을 온전히 맞이할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심판이 두려워 그냥 그렇게 고통받고 사는 게 싫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리서치에 따르면(Pew Research Center) 대부분 사회에서 가족은 삶 의미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물질적 복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진정한 가치, 곧 진정한 계명을 잊게 된 걸까요? 누구도 자기를 장님으로 만드는 욕망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로잡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사두가이들은 지극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추구하며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이러한 잘못한 시각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죽어도 산다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니시면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누구도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잴 필요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고 이것이 삶의 끝니 아니라고 믿게 될 때는 사람이 180도 바뀐다고 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우리 삶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나 완전한 희망으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어느 분이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 단계에 있는데, 이분의 소식을 들은 몇몇 지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반가웠지만 그냥 빨리 집에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로를 해준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지만, 자기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그들을 응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 오겠다는 분에게 오지 말라면서 나중에 다 낫고 밖에서 보자고 말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니 이상하게 외롭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병문안 자체, 즉 사람과의 만남만으로도 어렵고 힘들 때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도 말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살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점점 이 사회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독사,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사람이 한 해에 4만 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독사 역시 2023년 한 해 동안 3,000명 넘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역시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혼밥, 혼술 등의 용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불편함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만이 누군가 함께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완전히 자신을 낮추셨기에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째가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를 짓누르고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명언

결혼은 위대한 대화이다.

- 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모든 사랑의 기쁨은 하느님 사랑으로 시작됩니다. 사랑의 계명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진실한 사랑이 만들어가고 지켜내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합니다. 멈출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이웃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이웃을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계명이 우리의 온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욕심을 이기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삶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행복이며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 사랑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가장 소중한 삶을 만들어 갑니다. 사람과 사랑은 하나의 이름이며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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