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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6/0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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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2024년 6월 9일 연중 제10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6월 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6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2코린 4,1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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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창세 3,9-15
오늘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코린 4,13─5,1
오늘 제2독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나리라.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

 

 

마르 3,20-35
오늘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6월 9일
김상혁 노르베르토 신부

 

✚ 춘천 효자동성당 소개 00:23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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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령을 모독하는 죄, 완고함의 죄

율법 학자들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을 비난하시며 다음과 같이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심지어 신성을 모독하는 죄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의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서(1,10 참조)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성령으로 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행위의 근본적 의미는 죄의 용서입니다. 곧 성령의 행위는 죄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성령의 행위를 거부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자비를 청하며 용서를 구하면 언제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 용서하시는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의 행위를 거부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령의 행위는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행위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의 용서와 구원을 믿지도 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용서를 거부하고 우리를 죄의 상태에 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어떤 죄든 모두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급선무

오늘 연중 제10주일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누구와 싸울 것인가?’, ‘무엇과 싸울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정작 싸워야 할 것과는 싸우지 않고 괜히 엉뚱한 것을 붙잡고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두려운 만남을 앞두고 형과 싸우기보다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소소한 잘못을 놓고 싸우곤 하지요. 

우리 인생은 남의 잘못이나 갖고 싸울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먼저 내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급선무(急先務). 

급선무란 급하고 앞서는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우리는 급선무 식별과 급선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으면 그것부터 고치는 일이 급선무이지 그 발로 산티아고 걷는 꿈이나 꾸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남의 눈의 티나 빼주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엉뚱한 짓을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급선무를 놔두고 한가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지난 수요일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비겁함의 영 때문이고, 자신의 죄와 악과 직면한다는 것이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일 강론을 요약해 옮기면 이렇습니다. 비겁(卑怯)이라는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이나 노비라고 할 때의 ‘천함’과 ‘천민’의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이 두려워 일단은 자기는 그런 자기가 아니라고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보듯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이런 존재였다면 제2의 하와는 그 반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주님은 악령이 들린 분이 아니라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고 악령과 맞서 싸우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마리아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의 정배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이시지요.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정배가 되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고 초대하시고, 새로운 하와가 되어 안과 밖의 악령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와 싸우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래서 나와 싸우지 않고 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 싸우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어 남과 싸운다면 쩨쩨하게 나와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을 악하다고 하며 싸우지 말고 야곱처럼 하느님과 싸우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악령과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것이 영적으로 제일 강한 것입니다. 자기 안의 육의 정신과 싸우는 것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사 때마다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하는 예방주사 같은 한 마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할까요? 성령에 자신 안에서 행하려고 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방은 100% 가능하지만, 일단 걸리면 100% 죽는 병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광견병입니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특이하게도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다 피해 다닙니다. 뇌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포도, 신경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뇌에 도달하면 100% 사망입니다. 

아직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지만, 광견병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100% 예방됩니다. 그런데도 한 해에 지구상에서 6만 명 정도가 광견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 안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광견병 바이러스는 무엇이겠고 또 그 광견병을 무력화시키는 예방주사는 무엇일까요? 광견병은 ‘공수병’이라고도 하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서도 죽습니다. 사실 묵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령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긍정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지 못합니다. 사람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가 된 천민 아이는 기둥에 들어가 죽은 어머니의 피로 도망치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의 자아,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데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이제 교사는 자기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라이너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인정할 때 영향을 줍니다. 사실 퇴학 당한 것은 로베르트 자기 탓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하는 “내 탓이요!”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고 말씀과 성체로 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원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힘들고 암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탓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수 같은 인가도 용서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고정원 씨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고 성령께서 용서할 힘을 주셔서 그를 양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부족한 게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탄은 끝장이 난다.

‘생로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요. 인간이라면 이 네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늙음’을 겪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모두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生)’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물론 이 역시 자기의 기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입니다), ‘로병사(老病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하려는 우리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 순간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봉성체하며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봉성체 갈 때마다 이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너무 아파서 못 참겠는데 자녀들이 병원에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그때마다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 미움이 커져서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 나 혼자 이를 이겨내야 하니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혼자면 더 아픕니다. 나눠야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외톨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가족들을 계속 욕하는데 과연 사랑으로 계속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를 낮춰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춰야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하라 명령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조금이나마 낮춰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 모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마음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독한 죄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는 행위이기에 무거운 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할까요?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

- 몽테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우리는 어떤 어머니이고 어떤 형제들입니까. 가족의 닫힌 마음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슴으로 가족들을 뜨겁게 보듬어 주십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이 느낌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건강한 가족의 시작입니다. 건강한 가족은 갈등을 치유하고 아픔을 위로합니다. 가족을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족 구성원들입니다. 

실행으로 이어진 가족은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압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피붙이도 예수님과 함께할 때 더 소중한 관계가 됩니다. 가족을 잊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뜻을 실행하는 참된 사랑에서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만납니다. 우리들 또한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전달하는 예수님의 가족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나누는 뜻 깊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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