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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5/1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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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 자비를 얻고 도움의 은총을 구하자. 알렐루야.

주님, 주님의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를 영신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새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2024년 5월 16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5월 1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5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요한 17,23)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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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사도 22,30; 23,6-11
오늘 제1독서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그 무렵 

30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다. 

23,6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10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여, 내려가 그들 가운데에서 바오로를 빼내어 진지 안으로 데려가라고 부대에 명령하였다. 

11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요한 17,20-26
오늘 복음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22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저는 아버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6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5월 16일
유한동 크리스토퍼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2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 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

오늘 제자들을 떠나시며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에 대해 자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생각으로 즉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도 사랑은 누구를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사랑은 누군가를 내 안에 품는 것이고, 주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듯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지 않으셔도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지 않고 우리도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 되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 또한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한때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그리도 열망하고 애도 썼지만 언제부턴가 하나 되는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왜 포기했을까요? 

그것이 싫어서? 

아닙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 하나 되기를 바랐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가 아닌 우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이 문제로 미워하고 괴로워하기 싫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가 되는 데 최대의 적은 ‘완전한 하나’에 대한 열망입니다. 다르게 얘기하면 ‘완전, Perfect’에 대한 열망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완전에 대한 열망이 욕망 또는 욕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특히 하나 됨에 있어서 많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완전한 하나에서 부족한 하나가 더 아쉽고 불만입니다. 

100%의 하나에서 1%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고 불만이고, 숫제 10% 부족한 것보다 더 아쉽고 불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께서 완전히 하나 되기를 바라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무엇보다 바라시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적인 방법이고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서로 안에 머물기보다 하느님 안에 같이 머무는, 독탕에 들어가기보다 같이 욕탕에 들어가듯이 하느님 사랑 안으로 같이 들어가는 우리가 되는, 그런 꿈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해지려면 나의 영광을 죽이는 영광을 추구하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관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나면서 엄마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행복의 핵심이 됩니다. 반대로 관계가 깨질 때 분리불안과 같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관계는 먹고 생존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과 고통을 줍니다. 

그렇다면 관계는 어떻게 이뤄질까요? 일단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일반적으로 같은 목적을 전제합니다. 같은 목적이 없다면 만남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대학의 같은 학과를 생각해보면 쉽니다. 같은 것을 공부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목적으로 모이면 관계가 좋을까요? 막가파와 같은 집단은 부자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모인 조직입니다. 그런 조직은 조직원 간의 관계에서 행복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마귀들도 사탄과 같은 목적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관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목적이 같아서 모이기는 했지만,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피를 보고 모여드는 것을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모기 집단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흩어집니다.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2001)에서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 만든 이 반지는 다른 모든 힘의 고리를 통제하고 중간계를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하는 엄청난 위협을 깨달은 마법사 간달프는 프로도에게 집을 떠나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위험한 여행을 떠나라고 조언합니다. 반프로도는 겸손하여 그 반지를 끼지 않으면서도 그 반지를 파괴하러 가는 여정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정 내내 원정대는 위험한 풍경, 괴물 같은 생물, 사우론의 어둠의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추격 등 수많은 도전과 위험에 직면합니다. 인종, 문화,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지 원정대대원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단결과 협력은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보다 더 소중한 하나 된 팀이 되었습니다. 

모든 우리가 선택하는 일에는 항상 ‘영광’이 있습니다. 다만 모기와 같은 존재는 자기 영광을 추구함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2001) 같은 경우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기 영광을 희생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영광을 못 박고 아버지 영광을 위하셨습니다. 이것이 결국 부활과 승천 영광의 계기가 됩니다.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사도들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 결국 가장 완전한 관계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목숨을 주고받을 정도이며 영원합니다. 

저도 ‘어떻게 본당 신자들을 일치시킬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일치가 있어야 구성원이 행복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같은 목표를 주시되 그 목표가 자기 영광을 죽여야만 하는 목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보며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반지 원정대와 같은 자아를 버린 교회 공동체가 구성됩니다. 정말 관계로 행복해지려면 같은 영광을 추구하되 그 영광을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는 그런 영광을 얻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육으로 성인이 되어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지식의 성장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영적 성장에는 외면하는 부모가 많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은 “지금은 공부 때문에 성당 다니기 힘들지만, 어렸을 때 복사도 했으니, 성인이 되면 열심히 나갈 것입니다.”, “자녀의 종교 자유도 존중해 줘야죠.”라고 하십니다. 좋은 것이라면 아이가 싫다고 해도 챙겨주는 것이 부모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앙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현대인이 죽음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숫자가 늘어나고,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많은 모습에서 죽음의 문화는 그 세력을 더 넓혔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복음을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죽음의 문화 속에서만 있으면 생명의 복음을 지루하고 오래된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학협회의 정식의학회지에 발표된 연구가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미국인의 경우 자살할 확률이 5배 이상 낮다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연구에서도 정기적으로 교회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살할 성향이 적다는 발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곧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 성장만 무조건 ‘OK’를 외쳤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대상은 바로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 믿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면, 아버지의 사랑을 매 순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영적 성장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히 훨씬 더 큰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데도,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합니다. 참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닌 겉으로만 보기 좋은 것만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때때로 우리가 작고 미미한 방식으로 베푼 관대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 있다.

- 마가릿 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읽는 이 시간이 완전한 행복의 첫시간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이렇듯이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매번 넘어지고 흔들리며 아파하며 깨닫는 자리는 먼저 마음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의 뜻과 마음은 완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는 깨어있는 마음이며 뜻입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변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그야말로 변화와 관계성의 삶입니다. 

기도의 의미는 삶의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는 나눔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나누시고 행복을 나누십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이 됩니다.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누리는 행복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완전함의 초대는 함께하는 행복의 초대입니다. 

정성을 가득 담은 기도가 행복의 시작입니다. 완전한 행복을 이루시는 주님께 뜻과 마음을 돌려 기도드립니다. 오월처럼 맑고 기쁘고 행복한 우리들이 되게하여 주소서. 완전히 하나되는 일치를 성체성사로 만나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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