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4년 5월 17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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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25,13ㄴ-21)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21,17)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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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25,13ㄴ-21
오늘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요한 21,15-19
오늘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5월 17일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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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낱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호의적 감정과 끌림을 뜻하는 ‘필로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는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가 쓰이는데, 이 동사를 통하여 ‘너를 희생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필레오’(‘필로스’의 동사형)를 통하여,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만, 아직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사랑인지를 묻는 예수님의 물음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두 번 되풀이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 라고 옮긴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아가파오’) 물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할(‘필레오’) 뿐임을 고백하자, 세 번째로 당신을 인간적으로는 사랑하는지(‘필레오’) 고쳐 물으신 것인데, 이 상황이 슬픈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필로스’)에서 참된 사랑(‘아가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서에서 묘사된 바오로처럼, 베드로 또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유혹의 정의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게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게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까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등…. 맞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건축에 온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우디는 하루의 건축 일을 마치면 오후 5~6시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전차와 부딪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 73세. 그런데 형색이 초라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꽤 긴 시간을 사고 장소에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지나가던 택시 기사 한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입원 처리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후 3일이 지나고서야 그의 인부들이 병원에서 그를 찾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라서 수술하고 3일이 지난 뒤에 하늘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너무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행색이 형편없다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외면한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 물음을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답변에 곧바로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이웃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또 단죄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들은 화려하고 멋진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역시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 없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명언
감사하다는 건 인생을 선물로 느끼는 능력이에요.
- 존 오트버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모든 것을 약한 우리들에게 쏟아부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약함을 안고 가듯 어린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약함을 돌보는 거기에 부활이 있습니다. 돌보는 오늘이 돌보는 이 순간이 부활의 가장 아름다운 부활의 순간입니다.
부활은 늘 가장 가까이에 있고 때로는 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부활은 서로의 약함을 돌보는 사랑입니다. 가장 약한 곳에서 부활의 복음이 선포됩니다. 부활은 서로의 사랑으로 빛이 되고 희망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돌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도와주시고 돌보시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갈 곳을 잃은 우리들에게 오히려 우리의 약함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약함이 선물이고 돌봄이 감사입니다.
부활은 길마다 약함을 풀어놓고 사랑은 약함을 돌보는 선물이 됩니다. 은총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돌보지 않음이 아픔입니다. 서로를 돌보는 돌봄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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