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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1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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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소서.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성령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하소서.

2024년 4월 1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1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9,1-20)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오늘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6,57)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한 6,57) by 피어나네 성경구절 성경말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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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요한 6,52-59
오늘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19일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44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어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었다면 오늘은 성찬 전례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두 가지 방식, 곧 말씀과 성체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복음)와 함께 ‘바오로의 회심’(독서)이 함께 연계됨으로써 ‘만남’에 대한 내용이 부각됩니다.

바오로가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에 이르렀을 때 ‘빛 속에서 땅에 엎어진 상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살과 피’라는 표현이 절마다 되풀이되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는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 대한 부정적 평판을 언급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주저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불편해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성체를 모시면서 그것이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냄새나 촉감으로 느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러 오시고 그 만남으로 새로운 힘을 얻으며, 그 동행을 우리 일상의 견고한 본질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을 만나는 자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주의자

저는 가끔 언론의 허풍스러운 표현들에 불쾌할 때가 꽤 있습니다. 왜냐면 ‘세기적인 결혼’이니 ‘세기적인 사건’이니 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엄청난 의미를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전도(轉倒)야말로 이런 표현이 어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사건일 겁니다. 세기적 사건 정도를 넘어 ‘전 세기적 사건’ 또는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그러나 제 생각에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전도, 이 사건은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고 구세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불교적으로 바꿔 얘기하면 돈오(頓悟)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점수(漸修)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점수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비해 단박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사울의 전도 사건은 이런 돈오 사건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사울이 고꾸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꾸라트리신 것이기 때문이고, 사울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회개에 있어서 주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회개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스스로 변하는 것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떨어지면 그 동력도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힘에 의한 변화는 그렇지 않지요. 그 동력이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울이 박해자에서 주님의 그릇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으로 된 것이기에 바오로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강력한 은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선택받았을 뿐 아니라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릇이 크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 이상이지요. 인간적으로 그릇이 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품이 크다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다시 말해서 꿈과 비전이 크다는 뜻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은총의 그릇이 큰 것이고 고난의 잔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결국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하기에 은총도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고난이 많다는 것은 은총도 많이 주신 것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전자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제 차에는 스마트폰 자동 충전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결 잭을 꽂지 않아도 충전할 수 있는 위치에 놓아두면 자동으로 충전이 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지방에 갈 일이 있었고, 습관적으로 자동 충전 장치에 스마트폰을 위치시켜서 운전 중에 충전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충전이 하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방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왜 충전이 안 되었나를 살펴보니, 자동 충전 장치에 이물질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접속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충전 장치의 충전이 시작되면 노란 불이 표시됩니다. 그러나 운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이 표시를 확인하지 않았고 또 당연히 충전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전원과 연결되어야 충전되듯, 우리 역시 주님과 연결되어야 삶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연결을 제대로 하지 않고, 또 막연하게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 빠지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자기만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 실천에는 인색한 사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신앙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입으로만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또 막연하게 연결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마트폰도 전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방전되어서 사용할 수 없듯이, 자기의 영적인 힘이 모두 빠져나가서 결국 주저앉고 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주 복음은 계속해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스스로 빵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방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충전된 삶을 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이셨습니다. 문제는 주님과의 연결을 피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누릴 것에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면서 치워달라고 요청해서는 결코 주님과 연결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까요? 
 
‘연결 불량.’ 
 
주님과의 정확한 연결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사랑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연결 불량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도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 마르크 샤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자연스러운 강물의 흐름입니다. 하느님 사랑처럼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참된 삶을 깨우쳐 주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생명의 길을 안내합니다. 가장 영원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살과 피로 삶의 지향점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통해 영원한 가치를 만납니다. 영원한 가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동경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과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인 주님의 살과 피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 됩니다. 생명의 빛은 가장 존귀한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존귀한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생명을 깨우쳐 주시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살과 피는 서로 통하는 참된 사랑의 실현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깨끗한 본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거품처럼 허황된 양식과 음료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와 같이 참된 평화 참된 축복으로 흐릅니다. 넘쳐 흐르는 생명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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