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2022년 11월 7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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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티토 1,1-9)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7,1-6)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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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복음
루카 17장 1-6절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지형규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7일 (월)
지형규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1월 7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와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그리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가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7회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만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저마다 여러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자답게 사랑하기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나 일반 대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웃을 사랑할 때 제자답게 좋은 일 하는 적극적인 사랑도 해야겠지만 소극적일지라도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사랑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 이런 의도와 달리 나도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남을 죄짓게 하는 겁니다.
부지불식간이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라는 뜻인데 실제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입니다.
전에 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후배들을 의식화하고 투사로 길러내곤 하였지만 이처럼 의식을 강조하고 의식을 하며 살려고 하더라도 우리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것이 현대 심리학의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 성찰과 아울러 무의식의 개조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오랜 기간 형성된 무의식을 개조하기 위해 그것을 또 오래 의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의 반복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청원자 양성을 할 때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듯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양성도 했는데 예를 들어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 하던 대로 문을 쾅쾅 닫아 이웃에게 피해 주던 형제를 이제는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해 문을 살살 닫는 것을 의식하고 반복하게 하면 나중엔 의식치 않아도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살살 문을 닫게 되지요.
다음으로 주님의 제자라면 형제의 죄를 무한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줘야 한다.”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데 주님의 제자라면 무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두 번 용서해줬는데도 그 죄가 반복되면 구제 불능이라며 포기합니다.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한두 번 용서해주는 정도이고, 더 이상의 사랑을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형제가 죄짓거든 꾸짖는 것까지 하라고 합니다. 꾸짖어서라도 죄를 짓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주는 것도 힘든데 꾸짖는 사랑까지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꾸짖을 때 상대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꾸짖는 것도 힘들지만 꾸짖을 자격이 없는 나라는 것을 알면서 꾸짖는다는 것이 더 힘들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힘들어도 사랑 때문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꾸짖어야 하고, 그렇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꾸짖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답게 사랑하는 것 참 힘듭니다. 그래서 힘드니 그만둘까, 힘들어도 사랑할까 선택해야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용서는 한계가 없다.
요즘 군대에서는 사병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평일 일과 후와 휴일에는 휴대전화 소지와 사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고, 올해 말까지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는 소위 휴대전화 전에 많이 사용했던 삐삐도 있기 전이어서 무조건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중전화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수신자 부담 통화’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집에 전화 한번 하고 싶어서 공중전화 앞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편하게 휴대전화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신부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려고….”라면서 군대 다녀온 거의 모든 신부가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군대에만 충실해야지, 휴대전화가 있으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한 뒤에 탈영과 자살이 급격하게 줄었데.”
저 때의 군대 생활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군대는 옛날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휴대전화가 사람을 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경험이 무조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또 환경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사람은 무조건 율법 중심이었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세세한 규정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탈리오 법칙으로, 피해자가 받은 피해 정도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내리는 보복 법칙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말고 그 대신 용서하라는 새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용서는 한계가 없는 것으로, 회개하거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먼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함께 살아가는 일이란 타인이 겪었을 고통을 내 것인 양 상상해 보며, 그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땎따지 기다리고 옆에 있어 주는 일이다.
- 손미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삶의 새로운 시작은 회개이며 회개의 절박한 실천은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함께 걸어가는 우리들 일상이며 우리들의 오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용서는 무척 힘든 우리의 내적작업입니다.
뜨거운 신앙은 우리를 용서로 초대합니다. 병든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관계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간절히 묻게 됩니다. 미운 마음을 억울한 마음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용서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마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들 관계입니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우리들 관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상처는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됩니다. 서로 닮아있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용서의 길로 안내하는 십자가의 상처입니다. 원망하는 상처가 있기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용서의 시작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용서 안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회개이며 용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회개로 시작되고 하느님의 은총에 화답하는 길이 다름아닌 용서임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하고 용서하는 예수님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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