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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1월 1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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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2022년 11월 10일 (목)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필레 7-20)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1월 1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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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하느님, 사도들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를 저승의 세력도 결코 이기지 못하게 하셨으니 복된 레오 교황의 전구를 들으시어 교회를 하느님의 진리로 견고하게 하시며 언제나 평화로이 지켜 주소서.

 

 

복음
루카 17장 20-25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신동휘 도로테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0일 (목)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신동휘 도로테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10일 (목)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 어떤 준비를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가 올 시기에 관하여 다룹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고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하시는 것으로 복음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은 비단 바리사이뿐 아니라 당시 많은 유다인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온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표징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때를 추정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여러 사람이 잘못된 표징을 보이며 왜곡된 길로 이끌 텐데, 그들의 꼬임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십니다.

믿음은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 또한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구체적 표징, 확실한 ‘계시’, 강렬한 은사를 간절히 구합니다. 

이 목마름을 악용하여 인류 역사 안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올 시기에 관한 표징을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그리스도인이 애타게 기다리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종말은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구원의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마주 뵙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여러분은 오늘 어떤 준비를 하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동문서답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 언제라는 답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뜻이 되겠지요. 

사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도 복음을 믿는다는 것도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은 아직 회개한 사람이 아니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요. 

달리 말하면 회개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회개를 해야 하는 거지요. 사실 회개에는 여러 회개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회개와 영적인 회개가 있고, 인간적인 회개에도 마음이나 습관을 바꾸는 개인적인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나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바꾸는 관계적 회개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회개만도 우리에게 벅차기에 이 회개를 위해서도 낑낑대니 이 회개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회개 곧 하느님 나라의 회개가 궁극적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깨어있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나라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회개라고도 할 수 있고, 영적인 감각 또는 하느님 나라 감각이 깨어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으면 아들에게 깨어있는 어머니가 아들의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도 아들이 곁에 있음을 알아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아챕니다. 

호렙산의 엘리야에게처럼 바람결에 실려 오는 하느님 나라,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내려오는 하느님 나라, 새벽 실안개처럼 우리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하느님 나라를 느낍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지인이 보내오는 문자 하나도 그저 문자가 아니라 사랑이 온 것이요 하느님이 오신 것으로 느낍니다. 

문득 가을을 느끼듯 우리 가운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제라도 문득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성찰을 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금 하느님 나라를 잘 키우고 계십니까?

 

캐나다의 한 거리에서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어미도 보호자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강아지 모조를 목격한 와그너 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녀석을 데리고 갔습니다. 

다행히 모조는 와그너 씨 덕분으로 치료받게 되었지만, 어느 사람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녀석을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렸습니다. 모조를 처음으로 구조했던 와그너 씨는 줄곧 녀석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모조의 입양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병원에 연락을 취했던 와그너 씨는 심한 피부병 탓에 모조가 아직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와그너 씨는 그 후 몇일을 고민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와그너 씨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와그너 씨는 모조의 구조자를 넘어 영원한 가족이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오갈 데 없이 병원에 머물던 모조는 와그너 씨가 등장하자 마치 아빠를 기다렸던 아이처럼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와그너 씨 얼굴을 연신 핥았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가족을 만난 듯 모조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와그너 씨의 집으로 옮겨진 후, 심각한 피부병을 앓았던 모조는 몸과 마음이 점점 건강해졌고 온몸에 뽀송뽀송한 털도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모조는 멋진 성견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 준 남성을 만나자’, 유튜브 채널, 감동실화감동영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 나라는 다윗 왕국과 같은 외적인 강력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행복입니다. 그들이 행복의 기준을 돈과 쾌락과 힘으로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과 같습니다. 짐승들도 주인으로부터 그런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주인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부모가 나의 부모인지 의심스러울 때 항상 부모가 나를 위해 해 준 희생을 기억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안의 뱀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받은 사랑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도 바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기도는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억하여 감사와 봉헌의 마음이 생기가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 떨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입니다. 

2006년 3월 아르헨티나, 셰퍼드 카피탄을 기리더 주인 미구엘 구즈만이 죽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카피탄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모두 돌아다니며 애타게 카피탄을 찾았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단념하였습니다. 

일주일 뒤 가족들은 미구엘이 묻힌 카를로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미구엘의 무덤 앞을 지키다가 가족들을 발견한 카피탄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족들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가족들이 카피탄을 단 한 번도 묘지에 데리고 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묘지 관리인은 개가 나타나 묘지를 한 바퀴 돌더니 자기 주인 묘지 앞에 섰고 아무리 쫓아내도 다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카피탄은 번번이 집에서 도망쳐 미구엘의 비석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발견되곤 하였습니다. 묘지 관리인은 그런 카피탄을 측은히 여겨 먹이를 주고 보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카피탄은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무덤 위에 올라가 감싸 안 듯 엎드립니다. 그리고 밤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둠과 추위로부터 주인을 지켜주려는 모습 같습니다. 죽은 미구엘의 아들 데미안 구즈만은 “카피탄이 ‘죽을 때까지 여기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카피탄은 2018년 10년 넘게 주인의 묘소를 지키던 카피탄은 미구엘의 비석 위에서 엎드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죽기 4년 전부터 동물병원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도 묘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주인의 곁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공동묘지의 개’라고 물리던 아르헨티나의 콜리도 있습니다. 콜리도 9년간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콜리가 무덤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가족들은 밧줄까지 가지고 와 콜리를 묶어 집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콜리는 도망가고 무덤들 사이에 몸을 숨기며 돌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유족들은 콜리를 데려가기를 포기했고 콜리는 묘지를 집 삼아 묘지 관리인과 친구처럼 지내며 총 9년간, 조용히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콜리가 죽자 묘지 관리인은 콜리가 주인과 함께 묻히고 싶었을 것이라며 콜리를 화장해 주인 무덤 위에 뿌려주었습니다. 

[출처: ‘죽은 주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에서 오열하는 강아지’, 유튜브 채널, 이슈텔러]

이러한 사례는 꽤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어도 동물도 당연히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분명 슬퍼할 것입니다. 

개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분명 주인이 자신에게 해 준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기억하기 위해 죽어도 주인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가족으로 입양하시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우리도 미사 때나 기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럴수록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 행복이 커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 때 나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뱀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명 감사로 끝나야 합니다. 자기 봉헌으로 끝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올바른 예배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퇴색하는 전례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위가 되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채우는 방법 다섯 가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홀로 간직하기 힘들기에 사람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인가 채우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1) 물건으로 채우기
‘제대로 된 옷이 없어.’ 식으로 ‘~제대로’에 꽂혀서 필요하지 않은 쓰레기들을 집안으로 들입니다. 쇼핑센터와 백화점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충동구매를 시전하여 카드값을 보고 현타를 맞는다고 하지요. 
 
2) 사람을 채우기
아는 언니, 동생, 선배, 후배 등 모두 소환해서 “내가 쏜다”를 외치며 사람들과 섞여 신나게 놀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함은 더 커집니다. 
 
3) 새로운 모임 가기
아는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아 새로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친해지려고 애쓰고 돈과 시간을 쓰고 허망하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4) 먹는 거로 채우기
고독이 밀려올 때 허전함을 먹으며 채웁니다. 고독의 먹이가 음식이 아님을 알아차릴 때 이미 자신은 뚱보가 되어 있습니다. 
 
5) 일과 공부로 채우기
외로움을 느끼기 싫어 엄청 바쁘게 지냅니다. 일중독, 공부, 강의 중독으로 시간에 쫓겨 다니다 결국 몸이 상하고 나서야 더 큰 고독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런 것으로 과연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외로움은 따뜻한 위로로 채워집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만 옆에 있어도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의 존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마음을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큰 관심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정치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 기대는 더 간절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권이 반드시 재건되리라는 성경의 예언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와서 해방되어야 자기들의 텅 빈 마음이 채워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관점을 전해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으로 굉장한 팡파르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온다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을 주님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텅 빈 마음을 세상의 것으로만 채우려고 해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

- 에스토니아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나무들에게는 숲이 있고 숲에게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그려내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맑으면 우리의 일상도 깨끗하여집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가운데에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잃고나서 후회하는 마음입니다. 소중함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아픔을 감싸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

음과 일상에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진심으로 돌아가는 길이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길입니다.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행복도 닫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도 마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마음이 따뜻하여지면 하느님의 나라도 따뜻하여집니다. 마음을 하느님께 여는 하느님의 나라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들 마음을 기다리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마음 밖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에 눈을 뜨는 신앙의 기쁨 마음의 기쁨 감사의 기쁨입니다. 여기 마음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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