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그분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그분이 뽑으신 야곱의 자손들아! 그분은 주 우리 하느님, 그분의 판결이 온 세상에 미치네.
2022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필리 3,3-8ㄱ)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1-10)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복음
루카 15장 1-10절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임경수 알로이시오 신부 강론
2022년 11월 3일 (목)
임경수 알로이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1월 3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죄인의 회개와 이웃의 기쁨에 공감하는가?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배경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리는 상황입니다.
첫째 비유에서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다닙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무모해 보입니다. 그러나 길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며 이웃들이 자신의 기쁨에 함께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어서 은전 열 닢 가운데 한 닢을 되찾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은전 열 닢을 가졌던 부인은 잃어버린 한 닢을 찾으려고 집 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은전 열 닢’은 ‘열 드라크마’인데,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 은전 한 닢은 로마의 한 데나리온, 곧 당시 노동자의 하루 일당과 비슷한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열 드라크마를 전 재산으로 가지고 있던 두 번째 비유 속 부인에게 한 드라크마는 재산의 십 분의 일, 곧 적지 않은 손실을 뜻합니다. 은전 한 닢을 되찾은 부인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며 이웃들을 초대합니다.
이처럼 잃었던 양과 은전을 되찾은 비유에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초대가 반복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이 초대는 죄인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질문합니다.
나는 죄인의 회개와 이웃의 기쁨에 공감하는가? 내 기준에 사로잡혀 함께 기뻐하지도, 함께 슬퍼하지도 못한 채 ‘나만의 섬’에서 쓸쓸히 지내지는 않는가?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벌 나비일까? 똥파리일까?
오늘은 다음 말씀이 제 눈에 탁 들어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죄인들이 주님 말씀 들으려 가까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신앙인의 눈에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들이 실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이 죄인이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이 어찌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얘기한 죄인들이란 기준이 주님 말씀이 아닌 다른 것, 곧 율법이나 로마법이나 당시 실정법을 기준으로 한 죄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눈으로 본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한때 주님을 떠났었습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떠났었을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어서 떠났었을 수도 있고, 세속을 더 사랑하여 떠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통하여 이제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주님 말씀이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벌이 꿀을 찾아 모여들듯 우리에겐 주님 말씀이 꿀이고 향기여야 합니다.
요즘 너무 향기를 찾지 않고 악취 나는 것을 찾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를 보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데, 허비한다고 함은 그것들이 쓸데없거나 악의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왜 향기 나는 주님 말씀에 끌리지 않고 악취가 펄펄 나는 것들 곧 혐오를 조장하고, 극우든 극좌든 극단으로 치닫게 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노력하게 하기보다는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잡글들에 끌리는 것입니까?
심하게 얘기하면 그들이 벌이나 나비가 아니라 똥파리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번 이태원 사건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려는 유투버들이 온갖 자극적인 사진이나 헛소문을 유포하는데 그런 잡글들에 끌리는 사람은 다 똥파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말씀을 향기로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전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모든 사람의 종이기에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며 내 주님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전해야 합니다.”
나는 벌 나비입니까? 아니면 똥파리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잃어버린 양을 구하는 법 :
먼저 나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라!
유튜브 ‘SBS STORY, TV 동물농장’, ‘걸어 다니는 흰머리수리?’에 맹금이지만 소심쟁이 백설이가 나옵니다. 백설이는 하늘의 제왕이라 불리고 사냥의 명수 맹금류지만 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걸어만 다닙니다. 사람의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미꾸라지와 같은 살아있는 것들은 보기만 해도 질겁을 합니다. 먹이를 보고 도망 다닙니다.
백설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에게 길러졌기 때문입니다. 워낙 약하게 태어나서 사육사가 먹이를 집어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본인이 인간인 줄 알고 걸어 다니기만 하는 것입니다. 맹금류를 팔 위에 앉힐 때는 보통 소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사용하는데 백설이는 워낙 인간을 해칠 마음이 없어서 맨살에 올려놓아도 살포시 앉아있습니다. 본인이 인간과 인간 세상에 속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백설이를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자연에 속한 자신과 비슷한 것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동물농장에서도 매를 이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백설이도 들썩들썩하더니 동물을 사냥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보지 못해서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에 다니는 것들을 잡아서 먹게 되고 고공비행도 성공합니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사람에게 속합니다. 자연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 자연에 속합니다. 음식이 나오는 출처가 자신이 속할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십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과정이라고 하십니다.
왜 죄인들이 주는 음식을 예수님께서 받아 드셔야 할까요? 그 이유는 먼저 죄인들의 세상에 속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세상에 속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 ‘신원 조회 불가, 어느 날 산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할머니의 정체는?’에서는 40년간 이름도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산속에서 지내는 한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그 할머니는 남들이 먹다 버린 만두나 귤껍질 등을 삶아서 드시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진들은 그분을 자신들의 세상으로 끌어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할머니에게 그런 음식 먹으면 안 된다고, 자신들이 맛있는 것을 사드리겠다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제작진을 내쫓습니다. 자신의 세상과 그들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서 마치 사람이 새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소원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제작진은 먼저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텐트를 치고 침낭에서 자며 할머니와 대화를 시도하고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좋은 쌀과 김치로 밥을 지어서 제작진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작진들은 어쩌면 짐승에게는 적당한 그 음식을 받아먹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로써 제작진들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음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제작진의 세상에도 내려갈 용기가 생깁니다. 그렇게 할머니는 입원하여 치료받으십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보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세상에 갇혀 있는 분들을 우리 세상으로 끌어내는 이야기가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우리 집을 뺏으려 한다! 365일 화장실에서 생활하는 여인’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할머니는 누군가 자기 집에 독가스를 주입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항상 마스크를 하고 열한 달 넘게 화장실에서만 생활합니다. 이분을 다시 거실로 끌어내기 위해 제작진은 습기가 많고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할머니 어깨도 주물러드리고 이야기도 들어줍니다. 할머니는 제작진이 고마운지 화장실에서 라면을 끓여주십니다. 제작진은 화장실에서 할머니가 주시는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제작진이 당신과 다를 바가 없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들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결국 할머니는 거실로 나가서 정식으로 그들에게 밥상을 차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주는 음식을 드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제공하는 음식, 곧 미사 때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를 받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시고 죄인들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인간임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마치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봉헌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선악과를 봉헌해야 합니다. 내가 봉헌하는 것을 그분이 받는 것을 보아야만 그분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믿게 됩니다.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해석해 준 것에 고마워서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집에 초대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정성스러운 봉헌으로써 주님을 우리 안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그분의 세상에 속하기 위해 그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입니다. 이 성체와 성혈을 영함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분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실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때 그분의 세상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방식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똑같이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대여 서비스
무서운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앉아주는 일, 시내 중심가의 음식점에서 같이 카레를 먹어주는 일, 이혼 서류를 제출할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동행해주는 일….
이런 일에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누가 이 사람을 고용하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일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대박이 났습니다.
일본의 30대 청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대여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즉,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대여하는 서비스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는 싶지만, 외로운 것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조용히 가까이 있는 사람, 현대인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대부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까이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님께서는 늘 조용히 우리 곁에 가까이에 계십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셔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할 때만 간섭하실 뿐입니다. 이 모습에 다시금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주인의 모습을,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집 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부인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삶 안에서 힘들어서 주님 곁을 떠나는 우리의 모습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고, 잃어버린 은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회개해서 당신 곁으로 다시 다가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이라며 투덜거리지만,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인의 회개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이 당연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판단과 단죄는 멈춰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곁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판단과 단죄보다는 사랑으로 그 옆자리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내 운명까지도 사랑한다는 뜻이다.
- 헤르만 헤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참된 기쁨은 잃어버린 것을 끝끝내 다시 찾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탄생은 회개의 탄생 기쁨의 탄생입니다. 주님의 집에서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회개입니다. 기쁨으로 살게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기쁨으로 살게하기 위해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기쁨을 얻고 기쁨을 나누는 삶의 참된 만남입니다.
회개는 기쁨으로 걸어가야 할 우리의 본분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회개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기쁨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회개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새롭게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삶을 인정하고 주님께 그 잘못된 삶을 기쁘게 바치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있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회개로 우리를 끝내 지켜내시는 사랑입니다.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회개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기쁨이 땅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모두를 기쁘게 하는 회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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