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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2022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4,1-6)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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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복음
루카 12장 54-59절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상선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1일 (금)
오상선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1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4차 산업 혁명의 물결로 급변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미리 갖추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학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변화가 지금껏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변화일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미래 역량을 기르고자 열심히 노력하라고 주문합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가올 미래를 궁금해하고 이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주변에 용하다는 분을 찾아가 점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도 어쩌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지 모릅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미리 대비함으로써, 오늘을 좀 더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현상들은 때때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지표가 됩니다. 기후 현상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래전부터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지금의 기후 현상을 분석한 다음, 앞으로의 날씨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합니다.
오늘 복음도 이스라엘의 날씨를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서쪽에 있는 지중해에서 만들어진 구름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되면, 유다인들은 비를 예측하는데 실제로 비가 옵니다. 이스라엘 남쪽 사막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면, 유다인들은 곧 날씨가 더워질 것을 예측하고 또 실제로 더운 날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요 골자는 그렇게 날씨를 예측하는 일에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면서, 왜 메시아가 와 있는 지금 상황, 곧 ‘이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굼뜨냐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현존과 활동으로 이어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분명한 표지와 표징들을 보았음에도 곧 다가올 종말과 심판을 준비하는 ‘회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양입니다. 분명히 보았는데도 못 본 척하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나무람을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연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구원의 표징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다가올 미래를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평화의 끈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공동체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애초부터 쉽지 않고 그래서 애써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애쓰라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 애쓰지 않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애쓰다가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조금 더 아니, 많이 애쓰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 제게는 들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표현들만 봐도 일치는 많이 애써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겸손, 온유, 인내심, 사랑을 가지고 참으라고 합니다.
서로 참아 주라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 불편하고, 서로 불쾌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게 하며,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형이고,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면,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그래서 참아야 할 것이 애초에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 없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힘들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고 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갈리는 것입니다. 바뀌라고 요구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과 사랑을 지닌 사람은 참을 것이고, 그것이 없는 사람 곧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내 마음에 들게 바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참기 위해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바탕이 된 사랑을 지니려 애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곳, 곧 코린토 전서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며(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요.
이런 것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실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든 것이 내 맘에 들도록 다 좋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려 애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치를 얘기합니다.
평화의 끈?
끈은 하나로 묶어주지요.
그런데 불화는 묶어주지 않고 갈라서게 하니 아예 일치의 끈이 될 수 없고, 당연히 평화라야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의 끈이 되는데 제가 보기에 이 평화도 성령의 평화여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내 맘에 들기를 애초부터 바라지 않고, 사랑의 성령은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성령으로 평화롭게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바자회와 관련해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자회를 8시에 끝마치는 것으로 공지되었는데 이웃의 불평도 있었고, 봉사자들도 그때까지 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이 파악되었습니다. 그래서 6시에 바자회는 접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무리를 위해 봉사해주실 형제님 계시면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심판을 피하려면 : 내가 합의해야 할 대상과 합의금이 무엇인지 알아야!
연예인 박수홍 씨 친형이 구속되었습니다. 박수홍 씨는 근 10년간 100억 이상을 횡령한 혐의가 있는 형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이전 20년 것도 있지만 그것은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박수홍 씨는 목숨을 끊을 생각도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형제, 모두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대로라면 박수홍 씨는 친형제나 자녀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용당하였습니다.
박수홍 씨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형과 7대 3으로 재산을 나누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형의 재산은 1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생이 번 돈 중에서 상당 액수를 가질 수 있었지만 형은 그 합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수홍 씨는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7-58)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서 그 값을 다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 심판 때 나를 고소하는 자일까요? 당연히 내가 피해를 준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해를 준 대상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됐다고 할 때까지.
저도 군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 트럭으로 프라이드 한 대를 폐차시켰습니다. 다행히 그 차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만 원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저는 군 재판에 넘겨지어 그에 해당하는 만큼 옥살이해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그 돈을 여기저기 꾸어 마련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 피해를 주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녀가 누구에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 사랑에 반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에게 그 죗값을 보상하도록 오히려 합의금을 내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를 짓는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양심’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소합니다. 양심의 고소를 당하는 이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심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들어주신 우리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느님의 법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멈추려면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해 주신 것처럼 하느님 자신이 합의금을 내어주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이 그 합의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해 주셨습니다. 그 합의금을 받는 순간이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입니다. 고해성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으로 나의 고소자인 양심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치 제가 제대하고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을 원치 않고 내 힘만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옥살이하고 나와도 부모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해성사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완전한 합의금을 주셨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가라앉으면 미움도 가라앉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비가 심판을 이깁니다. 내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만나느냐, 따듯한 부모로 만나느냐는 내 안의 양심 가책을 당신 피로 잠재워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잔잔한 마음을 만드는 방법
세숫대야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을까요? 당연히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세숫대야가 흔들려서 물이 계속 출렁거릴 때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잘 보려면 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해서 물의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부정적 생각이 자기를 더 힘들게 하는데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이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에 나를 똑바로 볼 수 없으니 자기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니 제대로 살기 힘들게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다. 침묵 속에서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알아봐야 하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 나라를 꼭꼭 숨겨 놓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징조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징조가 보여도 무시하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기예보를 과학화하여 기압의 수치로 나타내지만, 하늘을 보고 또 바람의 방향을 보고서 날씨를 알아맞히는 것은 옛날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농사일을 위해, 전쟁의 작전을 짜기 위해서도, 그리고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서도 날씨 아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을 보고, 바람을 보면서 날씨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징조는 어떠할까요?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행적과 메시지만 봐도 메시아가 여기에 있고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계속해서 세상 것과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몸을 흔들다 보니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칠 멸망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세상보다 주님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 수 있으며, 그 마음을 통해 하늘의 징조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왔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 앙드레 말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올바른 길로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생명의 길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란 신앙인들이 먼저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먼저 함께 살아가는 화해와 평화가 필요합니다. 화해와 평화를 담고 실천하기에는 마음과 정신이 너무 얕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올바른 삶으로 바뀌길 싫어하는 우리의 문제점들을 주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대안과 새로운 안목이 필요한 우리의 생활입니다. 생활과 동떨어진 신앙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듭니다. 위선자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길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물고 뜯고 싸우는 삶을 멈추고 인간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임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인간성의 파괴는 자연의 파괴이며 신앙의 파괴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화해와 용서라는 맑은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함께 잘 살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치를 이 시대에 가장 잘 적용시키는 길은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적극적이고 올바른 실천으로 이 시대의 징조를 깨닫고 올바른 표징이 되는 길입니다. 이 시대를 올바르게 풀이하는 길은 주님과 함께 올바른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실천이 참된 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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