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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10월 2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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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10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2022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페 3,14-21)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49-53)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10월 2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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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복음
루카 12장 49-53절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상엽 야고보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0일 (목)
김상엽 야고보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10월 20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불과 세례 그리고 분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과 ‘세례’와 ‘분열’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구약 성경에서 불은 ‘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무엇보다 세상을 정화하는 불을 일으키시어,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그 불로써 온전하고 합당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루카 3,16 참조). 따라서 그분께서 세상에 지르고자 하시는 불은 우리가 세례로 받게 되는 성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 

세례로 받은 성령의 불로 단련되고 정화되는 신앙인들의 삶이란 결코 순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화의 과정은 고통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고통을 겪으시어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세례란 당신께서 겪으셔야 하였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야 할 시련의 길을 몸소 앞장서 걸어 주신 분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신 그분께서는 신앙인들의 힘겨움을 잘 아시고 위로하십니다. 

신앙 여정에는 갈등이 따르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가장 친밀한 공동체인 가정까지도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평화를 주러 오신 분께서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역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화는 단순히 표면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이나 마음의 평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온전한 충만함이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충만함으로 향하는 굴곡의 여정에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불’과 ‘세례’와 ‘분열’이라는 용어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 여정을 다시 정의해 보았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믿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령과의 내통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방도로 우리 인간을 움직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그렇게 우리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면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시고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우리의 믿음의 합작 또는 합력인 셈인데 이렇게 합작하고 합력하면 최강일 것입니다. 

그 사랑이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될 것이기에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쓰지 않기에 그렇게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이 노상 실패로 끝나기 일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되는 것, 곧 성령을 통하여 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내적 인간이란 허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는 것도 떡대가 크고 힘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내면이 옹골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가 옹골차게 되는 데에 한몫을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 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우리 내면을 여는 또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란, 말하자면, 논에 물꼬를 트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꼬를 트면 그 물꼬가 비록 작아도 도랑의 물이 우리 논으로 콸콸 들어오듯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으로 콸콸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과의 내통이 믿음이고,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게 되며 그리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로 삼아 무엇이든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면 우리가 그리 원하는 사랑을 실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맺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끝맺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바자회를, 우리의 오래된 기도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성무일도 본기도에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희가 할 일을 일러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어, 오늘 모든 일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시작한 것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끝마치게 하소서.” 

오늘 강론은 바자회 개막 미사 강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눔을 한 것에 대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합니다. 봉사자 특히 남자 봉사자의 도움을 청합니다. 아침 바자회를 열고 저녁 바자회를 닫을 때 힘쓸 남자 분, 한두 분이라도 계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극적인 사랑도 있을까?

 

어느 아담한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어난 이야깁니다. 그 가게엔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가게 사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주 멋진 청년이죠.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가게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가씨의 목적은 레코드가 아닌 청년이었죠.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판이라도…?”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 판 얼마예요?”

“5달럽니다”

아무 말도 못 한 체 레코드판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레코드판만 사고 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가씨의 사랑은 깊어만 가서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아가씨는 유일한 친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가씨의 집을 정리하던 친구는 굳게 닫힌 작은 방문을 열게 됩니다. 이 방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판 수백 장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왜? 레코드판을 뜯어보지도 않고 쌓아만 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가씨에겐 전축이 없었습니다. 단지 청년을 보기 위해 레코드판을 사러 갔으니까요.

‘얘는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을 왜 이렇게 사 모은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는 무심결에 포장을 뜯어봅니다. 그 속에 쪽지 하나가 떨어집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p.s. 제 이름은 존이라고 합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다른 판을 뜯어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8시 가게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오늘 안 나오시면 내일모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판에 존이 쓴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존이라는 청년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년은 이야기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한 것이 맞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가로놓여 남자는 3년 동안 반응이 없는 노력만 했고, 여자는 말도 못 하고 기대도 못 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수줍음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모습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용당하고 버려지기 싫으면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을 받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소극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매우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에게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사랑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적극적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은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은 붙이지 않으면 꺼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불이 붙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과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려면 붙여야만 하기에 사랑이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다가가는 사랑만이 사랑일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을 붙이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먼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믿는 자신입니다. 자신이 내향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건너기 무서워도 자꾸 건너다보면 안 무너진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외향적인 경험을 하다 보면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으로 믿어가고 그러면 진짜 외향적인 사람이 됩니다. 

부탁하면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봐, 무시할까 봐 주저하는 사람, 거절당하는 상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하는 간단한 일조차 어려운 사람 등 우리 주변에는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책 『거절당하기 연습』의 저자 지아 장 또한 수줍음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꿈이었던 사업을 시작하면서 더는 거절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거절당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거절을 수치스럽고 개인적인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시도해봤다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거절에 내성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100일 거절 프로젝트. 100일 동안 황당한 부탁을 해서 일부러 거절당하고 무뎌져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도전을 통해 저자는 세상은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 훨씬 친절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다 내향적으로 시작합니다.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모든 동물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려면 외향적인 성격이 요구됩니다. 내가 외향적인 성격이 되더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향적인 성격,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외향적인 성격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하는데 소극적이면서 사람들이 다가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사랑의 본성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입니다.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듭니다. 내향적인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됩니다. 외향적으로 되고 싶을 때는 언제든 외향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성령의 불로 타버려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이웃에게 사랑의 불을 옮겨붙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나에게서 나가 상대를 방문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불은 태우지 않으면 스스로 꺼집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자네는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하다 보면 뭐든 될 수 있겠죠.”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어떤 목표 없이 그냥 무작정 공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공부하는 내용과 자기 계발의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무거나 공부한다는 것만큼 무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일본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떨까요? ‘일본어 필수’인데,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다면서 계속 중국어만 공부하겠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준비는 스스로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 없이 사는 우리는 아닐까요? 잘못된 목표를 세워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힘든 것은 아닐까요? 
 
구원은 편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고난의 시대가 오고 그 시대를 겪어낸 다음 구원이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물었을 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고통을 줄 거야.”라고 말하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을 철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악과 함께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 안에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가져올 수밖에 없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 프리드리히 니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뜨겁게 타올라야 할 신앙의 가슴 뛰는 순수한 불입니다. 뜨거운 신앙의 불은 우리를 비추어줍니다. 순수한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세상에 마음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의 불꽃으로 타올라야 할 신앙의 여정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은 뜨겁게 불타면서 세상을 밝힙니다. 너무 캄캄한 어둠에 익숙해진 우리들 삶입니다. 빛과 불을 말씀하십니다. 삶의 중심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의 구체적인 불이 있어야 합니다. 차갑고 메마른 삶에서 벗어나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뜨거운 예수님의 삶은 가슴과 가슴으로 전하여 집니다. 타오르는 가슴이 복음의 가슴입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이 우리의 길을 엽니다.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이 뛰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순서를 바꿔도 예수님의 뜨거운 가슴을 만납니다. 

가슴 아픈 십자가의 삶이 여전히 뜨겁게 우리 삶 안에서 타오릅니다. 타오르는 불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습니다. 하늘 나라를 만나는 방식은 타오르는 뜨거운 가슴입니다. 

타오르는 기도이며 타오르는 실천입니다. 복음의 언어는 가슴의 언어입니다. 뜨겁지 않은 우리를 보게하시는 예수님의 당부는 우리가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순수한 기쁨을 맛보며 살라고 당부하신다. 단풍도 타오르며 세상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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