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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2022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당신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위하여 자비를 청하는 가나안 부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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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5장 21-28절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8월 3일
김정호 미카엘 신부 강론
2022년 8월 3일 (수)
김정호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8월 3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3일 (수)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때때로 성경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당혹감을 줄이고 읽는 이가 받을 충격을 조금이나마 약하게 하고자 “강아지”로 표현하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이 ‘자녀’ 또는 ‘양’이라면, 가나안 여인, 곧 이방인을 가리킨 “강아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개’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로 지칭되었고(이사 40,11 참조), 이방인들은 대단한 혐오의 대상으로 흔히 ‘개’로 불렸습니다. 개는 아무리 해도 개이고 양은 어떻게 해도 양입니다. 개가 양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그분의 개입 없이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인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개’입니다. 그런데 구원자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개가 양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태오 복음사가가, 당혹스러운 정황 설정과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메시지일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처지를 가나안 여인과 “호되게 마귀가 들린” 그의 딸로 지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시간으로도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도 베푸셨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이전까지 그 어떤 이스라엘 사람도 들을 수 없었던 놀라운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곧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방인에 대한 멸시와 그들의 불결함과 무자격성에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강조하려고 오늘 복음은 극적인 대비와 반전의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엄연히 차별이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 정결한 이와 부정한 이, 거룩한 이들과 죄인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늘 대단히 끈질깁니다. 스스로 열심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일수록 자신은 선별되고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이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차별을 멀리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별과 민족, 나라, 종파, 소속, 학연, 지연, 빈부, 장애 등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인이 볼 때 어긋난 신앙을 지닌 사람을 상징하지만, 오히려 예수님께 참된 신앙인의 모범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애타게 구원을 청하여, 그것을 아무런 자격 없이 거저 받았음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나안 여인에게 자존심과 욕심이 없는 이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제4화’에서는 세 형제가 재산 상속 때문에 재판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영우 변호사의 절친인 동그라미의 아버지가 형들에게 속아서 100억 상속 중 20%만 받기로 했는데 상속세까지 내게 되어서 오히려 2억 정도를 더 세금으로 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우영우는 동그라미 아버지가 도장을 찍었다던 각서를 보고 기망행위로 계약이 취소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그런 법은 이미 사라졌는데, 속여서 도장을 찍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동삼의 큰형이 상속법 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며 동동삼이 평소 형들을 어려워했다는 점을 가지고 사기 및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였음을 주장하려 하나 증거가 없었고 형제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유일한 증인인 이장은 동동삼의 형들에게 매수되어 법정에서 거짓 진술합니다.
피고의 기망행위를 입증할 수 없어 난항을 겪던 중 동그라미의 “그놈의 증거, 내가 만들 수도 없고!”라는 말에 힌트를 얻어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떠올립니다.
민법 제556조, 증여 계약 기간 중에 증여자에게 범죄행위가 일어났을 때는 증여 계약이 해제될 수 있다는 법조를 따라 동그라미와 동동삼이 형제의 자택에 가서 어그로를 끌어 폭행을 유도함으로써, 폭행 관련 진단서나 자료를 제출해 사건을 해결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피고 측 변호사가 “아, 잠깐만요! 혹시, 증여 해지를 노리고 폭행을 유도한 것은 아닙니까?”라고 말하지만, 우영우는 “그렇다는 증거 있습니까?”라고 일격을 날리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동동삼은 왜 형들의 강압에 못 이겨 도장을 찍어주었을까요? 동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형들은 왜 더 많은 재산을 가지려 했을까요? 부모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돈이 좋아서 더 가지려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살기 힘든 사람들이 더 돈에 대해 욕심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의 상속 재산이 많아질수록 형제간의 싸움이 더 커집니다. 변호사들이 말하길 유산 30억이 넘으면 자녀는 반드시 싸운다고 합니다. 이건 그럴 재산이 없으면 굶어 죽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믿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면 어떨까요?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아니면 욕심 때문일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욕심내지 않습니다.
욕심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이미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받으면 그럴 자격이 있기에 받는다고 생각하고 못 받으면 자신은 그럴 자격이라고 믿습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가? 돈 때문에? 천만에. 재산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유산이 많을 경우. 특별히 30억이 넘으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결국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가 주는 재산에는 부모의 인정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재산을 통해 자녀가 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한 가지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자존심도 욕심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했다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에 욕심을 냄으로써, 또 상대를 심판함으로써 자신 스스로의 자존감을 키우려 합니다. 반면 믿음이 있었다면 자존심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은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녀 취급하시며 그녀를 개 취급하여도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찌꺼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다만 딸을 악령에서만 구해달라고 합니다. 욕심도 없고 자존심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하느님께서 자신을 인정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자존심을 세울 일도 욕심을 낼 일도 없게 합니다.
일본 강점기에 평안도 신천에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김익두입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매일 동네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아, 저 사람은 얼마 전에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하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목사를 시험합니다. 문 앞에 와서 “예수 믿으세요” 할 때, 설거지물을 얼굴에 확 뿌려버렸습니다.
“죽었나 살았나 보자.”
김익두 목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 살았으면 당신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믿음은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존심도 살고 욕심도 생기는 것입니다. 김익두는 돈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폭력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생기고 나서 길에서 저러한 모욕당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개라는 말을 듣고도 감정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발끈하여,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창조하신 백성을 ‘개’로 비유하시는 것은 좀 아니죠?”라고 말했다면 그 여인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이해되지 못 하는 행동과 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생기는 자존심과 욕심은 하느님께 인정받아야만 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계획을 찾는 믿음
죽음의 수용소라고 잘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하신 성인으로 대부분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순교자로 에디트 슈타인 성녀도 있습니다. 그녀는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처참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유다인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나치가 저지른 만행의 실상을 교황청에 적어 보내면서 개입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가톨릭 수녀여서 박해 대상은 아니었지만, 유다인 태생으로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1942년 8월 2일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살해되셨습니다. 성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원장 수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 중 다음 구절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내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 하느님의 계획에는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저는 온종일 좋으신 우리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게 기도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지만, 그 안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순명하고 있기에 계속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불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계획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굳은 믿음은 어떤가요?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가나안 사람은 예부터 이스라엘 사람이 적대시하던 민족으로, 하느님의 구원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며 믿음을 표현하는 가나안 부인을 주님께서는 함부로 내치지 않습니다. 옛 유다 문학을 보면, 하느님의 자녀들인 자기들을 ‘자녀’로, 이교인들을 ‘개’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교도에 대한 모독적인 표현인 ‘개’보다 부드러운 표현인 ‘강아지’라는 애칭을 사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믿음입니다. 유다인들은 식탁에서 식사가 끝나면 빵부스러기로 손을 비벼 씻었습니다. 그때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는 강아지 차지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 점을 빌어 자기 간청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이 믿음에 예수님께서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인정하십니다. 베다 성인께서는 이 가나안 여인에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신앙의 모범이 되었고, 끈기에 있어서 인내의 모범이며, 예수님의 냉정한 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겸손의 모범이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찾는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기의 직분을 천직으로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 송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마태 15,27)
미쳐 깨닫지 못한 부스러기 은총이 참으로 많다. 은총은 사물의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세속의 가치를 내려놓는 부스러기의 믿음이다. 낮고 보잘 것 없는 부스러기에서 참된 겸손을 다시 만나게한다.
크고 높고 귀한 것은 진실하고 아름다운 부스러기의 겸손이다. 복음은 겸손의 가치를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부스러기의 작은 소금 부스러기의 작은 빛으로도 관계는 치유된다. 한없이 작아져야 우리의 자아가 없어져 주님과 하나될 수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주님은 점점 커지셔야 하는 일치이다.
간절한 부스러기의 은총과 믿음에서 우리 생활의 방향을 다시 만난다. 작아지면 편하고 작아지면 은총이 된다. 부스러기의 믿음 부스러기의 실천이다. 작은 실천을 먹고 사는 신앙인들의 삶이다. 겸손이 없는 신앙은 균형을 잃어버린 아픈 우리들 신앙이다.
부스러기 믿음이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욕심을 비추어준다. 부스러기에서 바뀌어야 할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믿음의 가치와 생활의 참된 변화이다. 떨어지는 부스러기의 무한한 은총과 무한한 자비를 오늘도 우리는 받아 먹으며 살아간다. 욕심에 눈이 먼 우리가 부스러기 은총을 다시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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