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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
2022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훔 예언자는 피의 성읍인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때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인데,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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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6장 24-28절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정호 미카엘 신부 강론
2022년 8월 5일 (금)
김정호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이길재 베드로 신부 강론
2022년 8월 5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행복을 원하는데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가?
곤경의 날에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근심과 곤경 가운데 더욱더 주님께 다가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그리고 그분께 매달리고 그분께 손을 대었습니다(루카 6,19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생명을 얻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반기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그것을 잃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또 당신의 이런 선택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생명이 죽음에 이르도록 철저히 경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에게는 정말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난을 이겨 내고 생명을 얻은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12,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대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이 여전히 많은 신앙인에게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걸으셨고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해야 한다는, 신앙의 여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는데 죽어야 하는가?’ ‘행복을 원하는데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며, 희생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이고 선물의 표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누가 주님을 따르고 누가 따르지 않을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이렇게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론도 그렇게 묵상하고 나눔을 해야 마땅하나 왠지 오늘은 삐딱하게 이렇게 따라오라 하시면 따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게 되었습니다.
특히 요즘은 따르란다고 따르는 시대가 아니지요. 좋아야 따르지 억지로 또는 순종으로 따르라고 하면 아무도 따르지 않고, 그래서 요즘 성소자가 급감하는 것도 이런 시대 정신과 잇닿아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좋아서 따르는 것인데 그 좋은 이유가 바로 주님을 따르면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을 아는 사람만 따르지 그걸 모르면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따르는 것은 이런 뜻에서 아무나 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니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을 따르면 왜 행복한지 따져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 행복인지도 따져봐야겠습니다.
행복은 현세와 미래를 통틀어 행복한 것이어야 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현세에서만 행복한 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현세의 행복은커녕 당장의 행복 또는 순간의 행복을 쫓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복을 쫓으면 자연 그런 행복을 줄 존재를 따르겠지요.
어제 베드로 사도도 어쩌면 이런 행복을 쫓은 분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기껏 주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고는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반대함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사탄 소리를 듣습니다.
사탄이란 주님의 길을 방해하는 존재이고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서 물러나라는 호통을 듣는데 실은 “내 뒤로 물러가라!”고 번역해야 그 뜻이 맞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길을 막는 사탄이 되지 말고 주님 뒤에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분명 수난과 부활을 모두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당장의 수난만 보고 그 길을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뒤의 부활까지 봤다면 반대치 않았을 것이고 사탄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사탄이란 당장의 수난만 보고 뒤의 부활은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장을 추구하는 자기 목숨은 죽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목숨은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님께서 이 길을 먼저 가시면서 보여주시고 그 길을 뒤에서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진리와 생명의 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나인지 또한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다정한 것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다정해지려면…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해주고 싶습니까? 세상에 더 많은 사자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한 사슴이 뛰노는 숲을 원하십니까? 아마 두 종 중 하나가 멸종한다면 사자가 먼저 멸종할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은 인간처럼 강한 존재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슴과 같은 존재가 세상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사슴 같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살게 하고 싶을까요? 인간은 히틀러처럼 한 민족을 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에게 공격받는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든다. 사슴 같은 자를 순수하고 착하게, 늑대 같은 자를 독하고 악하게 여길 것이다. 용기와 열정으로 사슴을 지키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시무시한 늑대 소굴에서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강한 자의 특징은 의외로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한 자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 자비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무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이 자비심이 클수록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은 그 친화력이 1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숫자가 많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더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이다 보니 언어와 같은 소통 능력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기술적인 능력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히틀러처럼 다 약한 종족을 사정없이 죽이는 잔인함도 동시에 표현되었습니다.
어쨌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화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화력이란 타인에게 손톱과 이빨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친화력을 마치 늑대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고 부릅니다.
20세기 러시아 학자 벨라예프와 류드밀라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야생 여우 중에 친화력이 강한 여우들을 선택하여 몇 번에 걸쳐 교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주둥이가 짧아지고 송곳니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포식성과 호전성이 감소하여 더 귀여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야생의 보통 여우들보다 5배 많아졌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세로토닌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인간에게 길든 여우는 사람의 손짓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을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면 개와 같은 길든 동물은 그 손짓을 알고 음식을 찾지만, 침팬지와 같은 동물은 그것을 믿지 않고 본인 능력에 의존하여 찾으려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침팬지나 늑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만 가축화 한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가축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송곳니를 숨기고 그 지시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참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유튜브 채널, ‘요요’]
자비심이 가장 강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자비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파괴하지만, 자비심이 큰 인간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심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발톱과 송곳니를 덜어내는 십자가를 통해 형성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은 안 먹어도 40일은 살지만, 사랑을 4일만 받지 않아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하루에 1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지만 사실 매일 자살로 죽는 사람이 40명 가까이 됩니다. 어느 게 더 큰 병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일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 받지 못하는 바이러스일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107회에 ‘소아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인생 공허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모습의 초1 여자아이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두렵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이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이혼 직전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헤어질까 봐 더 불안합니다.
싸움은 왜 일어날까요?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피 흘리지 않아서입니다. 친화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화력은 결국 내 송곳니와 발톱을 자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아니면 나도 죽고 자녀도 죽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은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지기에 자녀들도 이를 감춥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부모는 임종 체험으로 관에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녀들은 매우 행복해합니다. 무엇이든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돈은 통장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흐르는 것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생명이 흐르려면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내어줄 수 없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선악과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도 마찬가지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해집니다. 다정해야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
연애하며 사랑의 감정의 고조되었을 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진심이야, 힘들지 않게 할게, 영원하자, 나는 달라, 믿어줘, 지켜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앞으로 잘할게, 항상 곁에 있을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이 말들이 모두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심이야’라는 말은 행동 없이 말뿐인 가짜 진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힘들지 않게 할게’는 너 때문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원하자’는 그냥 한때의 감정이었고, ‘나는 달라’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믿어줘’라고 했지만 자주 배신했고, ‘지켜줄게’라고 했지만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줄게’라고 했지만, 더 외롭고 불행해졌습니다. ‘앞으로 잘할게’는 역시 말뿐이었고, ‘항상 곁에 있을게’는 시간이 갈수록 곁에 없을 때가 더 많아지다가 결국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거짓이기도 하고, 변함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인 주님 사랑에만 기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보다 세상의 가짜 사랑, 거짓 사랑을 더 좇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유한한 세상 안에서의 사랑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든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전해줍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손해 보는 일 같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더 큰 이득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간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위로는 손을 잡고 그 추운 영혼 위에 이불을 덮어 주는 일, 그리고 그 따뜻한 이불이 내 영혼도 덮어 주는 일.
- 송경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 24)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여전히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실천이다.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은총 대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난다.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 한다. 대충과 그냥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자아의 집착이 아닌 자아의 죽음이 바로 참된 십자가인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공통분모는 십자가에 있다. 진심을 드러내는 삶 자체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우리들 관계이다.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섬기는 죄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참된 사랑이며 십자가의 방식이다.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 자기 파괴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버림이다. 십자가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함께 지고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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