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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2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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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24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7,18-25ㄱ)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오늘 복음
    (루카 12,54-59)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로마 7,18-25ㄱ
오늘 제1독서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형제 여러분, 

18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2,54-59
오늘 복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24일
성연준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0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지금 해야 할 기도와 선행을 자꾸 미루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날씨가 어떤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하루를 준비합니다. 하루 전에 날씨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밤에 별빛이 밝은 날은 다음 날 해가 쨍쨍합니다. 무릎이 쑤시고 허리가 아프면 어김없이 다음 날 비가 옵니다. 그래서 무릎이 쑤시면 늘 우산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날씨를 알아보고 그에 맞추어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그저 이 순간을 살아가기에도 벅차고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꾸 내일로 미룹니다.

라이트 형제가 맨 처음 만든 비행기는 공중에서 겨우 십이 초 머물렀다고 합니다. 시작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의 첫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비행기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바란다면 그분께 가는 여정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12,58)라고 하시며, 미루지 말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해야 할 기도와 선행을 자꾸 미루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원의와 반원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의 비참함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선을 바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바라지 않는 악은 도리어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볼 때 법칙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법칙이란 바로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를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역동을 더 선명히 느낍니다. 예를 들어 저는 미사를 드릴 때 갈수록 그 신비에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부분에서 거의 빠짐없이 신비를 깨는 생각이 훅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잡생각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 느닷없이 생각나고, 어떤 때는 거룩함과 정반대되는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도 자주 반복되기에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정말 사탄이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가고자 하는 우리의 거룩한 원의에 반원의(反願意)가 안팎으로 항상 있습니다. 반원의가 안팎으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밖의 사탄과 안의 반원의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안의 욕망이 없을 땐 밖에서 사탄이 아무리 유혹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배가 고프고 술이 고플 때 먹자고 꾀야 그것이 유혹이 되고 넘어가겠지요. 그런데 내 밖 사탄의 준동에 내 안에서 반응하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육의 나”라고 하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정신”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체험을 강하게 했을지라도 육의 나나 육의 영이 내 안에서 말끔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본능이 사라지거나 습관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니며, 맛들이고 길들어진 내가 완전히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육체의 내가 완전히 죽어야지만 사라질 것이고, 이 육체의 내가 살아있는 한 육의 나도 살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 안에서 강력히 활동하실 땐 음성적으로 있다가, 곧 죽은 척 있다가 때가 되면 슬며시 다시 살아날 겁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으라는 주님 말씀에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주인님께 대해서도 깨어 있고, 본능과 습관과 육의 나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또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징조”를 잘 읽고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도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문헌들], 특별히 [사회회칙들]에 잘 드러납니다. 곧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에 발표하신 교황 권고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후속 권고 문헌인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는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기 위해 ‘생태적 회심’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56-57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주님!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으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시대의 방관자,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긴급한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고소인과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너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한 편의 법정 드라마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 마지막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고소인’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고소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고소인이라 하면, 묵시록에 나오는 ‘악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고소인이 악마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소인은 재판관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 하느님이시라면, 고소인 역시 하느님의 편에 선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두신 ‘양심’ 이며,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주신 ‘거룩한 법’ 입니다. 결국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는 이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형 에사우의 군대였지만, 정작 그의 발목을 잡고 머뭇거리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형을 속이고 얻은 이 장자권을 가지고 과연 합당하게 살았는가?’

이 양심의 고소가 야곱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습니다.  

그가 이 고소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야뽁 강가에서 정체 모를 존재, 즉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교만, 잔꾀를 상징하는 뼈가 부서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자신을 고소하던 양심의 실체인 형 에사우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앞에서 땅에 일곱 번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형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양심의 고소는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 그것은 우리 영혼을 가두는 가장 끔찍한 감옥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모든 눈길과 대화가 자신을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방은 문자 그대로 감옥이 되고, 그의 삶은 지옥이 됩니다. 결국 그는 이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소하는 양심과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길을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과의 화해는 ‘주님,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교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 저는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는, 그런 나약한 나를 아시면서도 당신 아드님의 피로 나의 죄를 언제나 기꺼이 씻어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탁하며, 눈물로 그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처럼 땅에 일곱 번 엎드려 나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내 이웃 안에서 발견하며,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나 같은 비참한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죄가 클수록 그분의 자비는 더욱 놀랍게 빛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고소인, 즉 율법과 양심과 완전히 화해했다는 최종적인 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용서의 실천’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바 모제스 코르 여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 의사를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과거의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나를 고소하던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풀어주는 마지막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나를 고소하는 자는 율법과 양심입니다. 그리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명확합니다. 첫째, 나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절망하는 대신 나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그 받은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받은 것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자비로운 가죽옷을 입은 사랑받는 자녀로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어떤 아이가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왜 아직도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요?”
 
아마 어른이 되면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읽고 있으니 그 모습이 이상했나 봅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 지식은 차고 넘치지만, 저의 지식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부이기에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저의 경험은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데,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그냥 뜬구름잡기식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열심히만 살 뿐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저만의 소신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만들어가면서, 이 세상을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책을 꾸준히 읽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이 지구별에서 온전하게 생존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께 꾸준히 나아가는 노력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겸손해질 수 있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자기만의 신앙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주님께 막연하게 “알아서 해주세요.” 한다면, 주님의 손길을 전혀 느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무지가 아닌, ‘위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 현상을 분석해서 자기 일상(농사, 항해 등)에 대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지만, 정작 자기 구원과 직결된 이 시대의 징표는 외면하고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무엇보다 그분의 현존 자체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징표인데,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알아야 하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의 신앙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먼저 당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기꺼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라. 다음으로 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곧바로 그 일에 착수하라.(H. L. 린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변화를 온 삶으로 받아들이는 단풍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들 또한 받아들임이 올바른 순리입니다. 올바른 판단이란 진리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내면의 성실한 성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따르는 힘은 결국 깨어 있는 양심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똑똑해도 무엇이 옳은지 보이지 않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된 신앙의 행위이며, 하느님 뜻에 순종하려는 영적 식별의 열매입니다.

때를 알아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며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이 서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올바른 일을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판단은 우리의 진실성에 뿌리를 둡니다. 올바름은 이와 같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름의 멋진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회복하여 올바른 길로 서로를 안내하는 참된 사랑의 날 되십시오. 올바른 판단이란 하느님의 뜻과 사랑으로 깨어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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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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