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4,20-25)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13-21)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로마 4,20-25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은
20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루카 12,13-21
오늘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20일
김현균 야고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3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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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는다는 것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끔 밖에서 밥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늘 먼저 물어 오시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 무슨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
그런데 솔직히 대답하기 난감합니다. 아는 신부님이 신자분들에게 ‘수제비’를 좋아한다고 말하였더니 떠날 때까지 매번 수제비를 준비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인 ‘된장찌개’라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분들은 때때로 “신부님, 된장찌개 말고 다른 거요.”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너무 평범해서 누군가에게 대접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서겠지요.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옷을 입으며 어떤 집에서 사는지가 그 사람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나 입고 있는 옷이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얼마나 큰 집에서 사는지가 마음의 크기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보여 주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들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 씀씀이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고 나면 사라질 세상의 재화를 모으기보다는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는다는 것은 좋은 말을 하고, 자신의 인격을 닦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하느님 앞에서 재화를 쌓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는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로마서는 계속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 후손이라면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일지라도 저절로 갖게 된 것이 아니고 후손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경험을 보면 믿음이란 매번 결단하는 것이고, 결단을 내렸던 첫 번째 경험이 아주 중요합니다. 곧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단을 내렸던 첫 번째 경험이 있은 다음에도 매번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발소에서 그 첫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전과 같이 별 의심 없이 면도사에게 제 목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이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내 목을 맡기고 있지?’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면서 그분이 정신 이상자라면 또는 그날 안 좋은 일이 그분에게 있었다면 제 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찌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 계속 내 목을 맡길 것인가 말 것인가? 순간 고민했지요.
그리고 그때 저는 그분을 믿기로 했고, 앞으로 다른 모든 경우에도 계속 믿는 쪽의 선택을 하기로 했습니다. 믿지 않는 쪽으로 또는 의심하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이제부터 저는 아무도 믿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원칙과 믿음의 선택이 소중했던 것은 그것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도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기 어려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존재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데다 나의 삶과 죽음까지 거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 늙은 나이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 말을 믿어야 했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말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해야 했고 선택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말 믿어본다는 것이 재밌고 뜻이 있습니다. 해본다는 말이 일단 하고 보고 그리고는 한 게 어찌 되는지 본다는 뜻인 것처럼 믿어본다는 말도 일단 믿고 보고 그리고 어찌 되는지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도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쪽으로 도박하는 거지요. 불신이 부정적인 쪽으로 믿는 것이라면 믿음은 긍정적인 쪽으로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안 믿는 쪽으로 선택할 것인가? 믿는 쪽으로 선택한 것인가?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우리는 자주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중재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 주며, 자신을 지지해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수 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 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고,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진정,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 주님께 소유당한 사람만이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더블류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15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주님!
모든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물질이나 재물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명예와 권력
학문과 재능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간직하게 하시고
제 생명이
당신께 달려 있게 하소서.
주님,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끔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참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제 형에게 분부하시어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게 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형이 동생의 몫까지 독차지한, 아주 부정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정의의 편이신 예수님께서 "이 녀석아, 동생에게 당장 유산을 내놓아라!" 하고 호통치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황당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하시며 거절하시고는, 뜬금없이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하고 훈계하십니다.
아니,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시는 게 예수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까?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어딘가 이상하고 황당하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린다면, 그건 우리가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환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여보게, 안식일이니 좀 쉬었다가 허우적거리게나." 하면 그 말이 들리겠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누구는 '동산'에서 살고, 누구는 '정글'에서 삽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났던 뱀의 말을 믿으면, 우리는 정글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수 없어. 네 힘으로 살아남아야 해." 이 거짓말이 우리를 정글로 내몹니다. 정글에 사는 존재들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자신을 감추고, 속이고, 진실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야생의 멧돼지는 다리에 가시가 박혀도 절대 절뚝거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뚝거리는 순간, 약점이 노출되어 바로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정글에서는 이처럼 늘 긴장하고, 경계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이 갖고, 더 강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 정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온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산은 생존의 문제였고, 예수님은 그 생존 문제를 해결해 줄 힘 있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탐욕을 경계하여라. 재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하시니,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습니까?
프랑스의 장클로드 로망이라는 사람은 18년 동안 세계보건기구(WHO)의 저명한 의사 행세를 했습니다. 그는 의대 시험에 낙방한 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대한 거짓의 성을 쌓아 올렸습니다. 18년간 그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언제 거짓이 들통날까 봐, 약점을 잡힐까 봐, 정글의 멧돼지처럼 늘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거짓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부모님까지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없는 정글에서, 거짓의 옷을 입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냉전 시절 주한미군 병사였던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부대에서 잦은 말썽을 부리다 군사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그 처벌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망명하는 거짓의 길을 택했습니다. 장클로드 로망처럼, 드레스녹 또한 자신의 작은 거짓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의 체제라는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 한 것입니다. 그는 잠시의 위기는 모면했을지 몰라도, 남은 평생을 '위대한 수령 동지께 충성하는 미제 귀순용사'라는 거짓된 역할을 연기하며 더 지독한 정글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동산'에서 말씀하십니다. 동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생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이것만 하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동산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동산에 사는 사람에게 유산 다툼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동산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얘야, 그런 건 아버지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그저 형제와 사랑하며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글에서 나와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정글로 들어가는 문이 '거짓'이었다면,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은 '진실'입니다. 나를 가리던 나뭇잎 옷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 진실의 문으로 들어간 대표적인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입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도시의 주교,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 던졌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그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영을 상징하는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만을 모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려 했던 정글의 삶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동산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그 진실의 순간, 모든 것을 벗어 던진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말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을 벗어 던졌을 때, 그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게 되었고, 무너진 성당을 벽돌 한 장 한 장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위선으로 무너져가던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졸업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예수님 곁에서 3년이나 따라다녔던 가리옷 유다처럼 말씀을 돈주머니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진리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동산으로 이끄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환경에 서 있습니까? 여전히 거짓의 나뭇잎으로 나를 가린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정글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진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동산에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옭아매는 거짓의 옷을 벗어 던지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진실의 문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동산으로 들어갑시다. 그럴 때, 황당하게만 들렸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
실제로 선생님 말씀을 따라 열심히 의자에 앉아서 공부했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성적은 늘 바닥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만 본다면 1등을 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늘 앉아 공부했으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친구는 열심히만 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닐까요?
지금 저는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어떻게 책을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느냐고 묻는데, “하루 종일 게임만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아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흥미와 재미를 책에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냥 남의 것을 억지로 따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다지 재미가 없으며 힘들기만 합니다. 나의 재미와 흥미를 찾으면 남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재미와 흥미가 자기 미래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적인 만족은 공허함만 줄 뿐, 기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늘 순간적인 만족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재미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한 남자가 군중 속에서 예수님께 매우 현실적인 문제, 즉 형과의 유산 상속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청합니다. 당시 랍비들이 이런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기에, 완전히 엉뚱한 요청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에게는 ‘탐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세상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재판관이나 중재인이 아니라, 탐욕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탐욕 안에서는 절대 주님과 함께할 수 없고, 주님의 뜻도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비교하면 이 세상 삶도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위해 탐욕만을 유지한다면, 영원의 시간을 제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면, 땅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둔 성실한 농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독백을 보면 ‘나’, ‘내 것’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없는, 이 세상의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명언
남을 이기는 것이 ‘힘 있음’이라면, 자기를 이기는 것은 진정한 ‘강함’이다(노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의 시작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유한성의 삶입니다.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일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하느님의 것입니다. 미루어야 할 시간이 아니라 지금 사랑하고 나누어야 할 소중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재물을 쌓았지만 우리에게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마련해 두고 오늘 우리가 쌓는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 돌아가며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 맡겨집니다. 우리가 마련한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만을 남기고 떠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궁극적 최종 의미이십니다.
루카복음 12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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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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