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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1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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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1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16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3,21-30ㄱ)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47-54)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로마 3,21-30ㄱ
오늘 제1독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1,47-54
오늘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16일
세베로 이사악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1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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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용서의 은총

오늘 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3,22)이지만,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3,2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된]다.”(3,24)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죄와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죄와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은총을 우리는 때때로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과 실수가 크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 앞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데에만 그치고 구원의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을 감싸안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에 더욱더 주님 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편안한 장소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지치고 힘들거나 슬픔에 잠겨 있을 때도 조용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고 그곳에서 충분히 머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비의 열쇠를 걷어차지않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다.” 

오늘 율법 학자에게 하신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지식이란 게 무슨 지식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지식의 열쇠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지식이란 하느님께 대한 지식,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아닐까? 제 나름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명색이 학자이니 지식이 없는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누구보다 뛰어나고 세상에 대한 지식도 넘치도록 풍부할 것입니다. 다만 세상 지식 때문에 하늘나라에 관한 지식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왜 세상 지식은 많은데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은 없습니까? 주님 말씀대로 이들이 그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의 열쇠는 겸손이고, 그러니까 그 열쇠를 치워 버리는 것은 교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장인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10장과 11장을 나란히 배치하고, 철부지들과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교하는 겁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바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 달리 표현하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다는 사람은 안다고 생각하기에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기에 지식의 열쇠를 아예 치워 버린 것입니다.  

나는 모른다고 생각하면 알려고 할 것이고, 알려고 할 때 다시 말해서 물을 때 앎이 시작되는 것인데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려고 들지도 시작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아는 것이 하늘나라를 아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세상을 제대로 알면 하늘나라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만 안다면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면 세속이 되고 우리가 저세상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수이지만 하느님 창조물로 관상하면 하늘나라를 아는 열쇠요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첼라노는 이렇게 프란치스코를 묘사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고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으며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그는 홀로 모든 사물에서 사다리를 만들어 그 사다리를 밟고 옥좌로 올라갔다.”  

어쨌거나 겸손은 모름이 앎의 시작이 되게 하고, 자신이 모르는 신비를 하느님께서 열어주십사고 청할 것입니다. 그러니 신비의 열쇠를 걷어차 버리는 교만과 집착은 버리고 신비의 열쇠를 주십사고 겸손과 사랑을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어떨까요?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십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4 참조)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1,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의 주님!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제가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내가 반응하는 사람들의 결과다.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게 무슨 나쁜 일일까요?   

제가 알던 어떤 분은 아버지를 무척 미워했습니다. 술 마시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주 때렸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어머니를 박해받는 예언자라 믿었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도 똑같이 아내에게 그렇게 하여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나는 내가 반응하는 사람의 믿음대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만 닮는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참 신비해서, 사랑이든 증오든, 우리의 감정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대상을 그대로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감정이 반응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반응의 사슬을 끊어낼 유일한 길, 우리 조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혁명적인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들의 어두운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가장 완전한 길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참된 근원,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우리의 유일한 ‘조상’, 즉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신 순간, 인류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상처 준 부모나 나를 억압하는 세상이 내 삶의 기준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나의 유일한 기준이요, 내가 반응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을 보십시오. 19년의 감옥살이 후, 그의 영혼은 자신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에게 온통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자베르의 불신과 세상의 냉혹함이 그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리엘 주교가 은촛대를 훔친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의 세계는 뒤집힙니다.  

“여보시오, 형제여! 이제 당신은 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사들인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내가 그것을 악한 생각과 파멸의 정신에서 빼내어 하느님께 바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를 통해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처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던 조상이 자베르에서 아버지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모든 삶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자비에 합당한 아들로 살 수 있을까?’라는 새로운 반응으로 채워졌고, 마침내 성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습니까? 젊은 시절 그는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의 가치관, 즉 명예와 부에 반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야, 무너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만납니다. 육신의 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진 그의 행동은, 옛 조상과의 완전한 단절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라 말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라 자유로이 말할 것입니다!” 

그는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에게 반응하기를 멈추고, 완전하신 하늘의 아버지께 온전히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의 소리에, 어떤 조상의 소리에 우리 삶을 조율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세상의 불완전한 가치관이라는 시끄러운 소음에? 거기에 반응하는 한, 우리 삶은 결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교향곡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일하고 완벽한 기준음, 우리 영혼이 조율해야 할 단 하나의 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서운 대물림을 끊어내시고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땅에서는 아무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마태 23,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감정은 누구에게 반응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그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잠 못 들게 하는 그 기억, 그 상처, 그 분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가, 당신의 영혼을 빚어가는 ‘조상’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싱크 홀’로 알려진 지반 함몰 현상을 알 것입니다. 작년과 올해, 서울과 부산에서 거대 싱크 홀로 인명 피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싱크 홀이 종종 발생하는데, 가장 큰 피해는 과테말라시에서 있었던 지름 20m, 깊이 30m의 싱크 홀로 3층 공장을 삼키고 교차로 하나를 무너뜨린 것이었습니다. 도시 공공시설에 심각한 피해를 줬고, 많은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습니다. 싱크 홀은 자연재해가 아니라고 합니다. 땅을 순식간에 침식시킨 것은 집중 호우와 낡은 상하수도관 부실 관리 때문이기에,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 계획가와 건축가들이 하수 시스템 정기 검사를 자주 합니다. 
 
지표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관리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부분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영혼의 상처가 누적되어 어느 순간 싱크 홀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기 검사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도와 묵상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겸손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계속 뒤로 미룹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매일 점검하는 사람과 특별한 날에만 점검하는 사람, 누가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을 향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폐쇄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것은 겉보기에는 과거의 예언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경건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들이 살아있을 때 외쳤던 ‘회개하라’는 불편한 메시지는 거부하면서, 그들이 죽고 나서야 안전하게 기념비만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조상들의 죄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0)라고 말씀하시지요. 
 
왜 하필 ‘이 세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인류 역사에 파견된 모든 예언자의 정점이자, 하느님의 아들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것은 인류가 저질러 온 하느님에 대한 거역의 역사를 정점에서 반복하는 최악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살면서 자기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싱크 홀처럼 어느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매일 삶을 점검하면서 위선적인 모든 모습에서 벗어나 참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립니다(브라더 로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역사(歷史)는 흘러가지만 책임은 남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사랑은 잊혀진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일하십니다. 오늘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언자의 피는 이스라엘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단절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기억과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죄는 반복됩니다. 이 악순환을 멈추기 위한 결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말씀과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며, 역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두려움의 가면을 벗고, 우리 안의 위선과 자기기만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 안에 서게 됩니다. 오늘의 역사는 우리의 책임 위에 세워집니다. 기억과 회개의 신앙으로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신앙이며, 우리의 기억이고, 우리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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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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