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6,19-23)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로마 6,19-23
오늘 제1독서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루카 12,49-53
오늘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23일
김현균 야고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3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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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저는 어릴 때 동생과 많이 다투었습니다. 동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동생이 대들어서, 동생이 말을 안 들어서 다투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한테 걸리면 둘 다 무척 혼났습니다. 한번은 속옷 바람으로 둘 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겨울이라 해는 져서 어둡고 추운데, 서럽기는 왜 그리 서러운지 동생과 저는 훌쩍이며 울다가 서로 화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다투고, 또 화해하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기는 하였어도 쉽게 화해하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이제는 다투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지금은 화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싸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싸운 뒤에 쉽게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과 갈라져 싸워야 한다면 예수님을 쉽게 따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단조로운 하루하루의 삶에서 오는 편안함이 아닙니다. 분열과 어려움을 겪은 뒤에 오는 평화, 하느님과 일치하며 누릴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치를 통한 평화를 주시고자 우리가 분열이라는 어려움을 겪기를 바라십니다. 분열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분열을 넘어, 예수님의 평화를 얻기를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인간적으로 비겁하지만 성령으로 불타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모든 평화는 다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 없이 생각하고, 하느님께서도 모든 평화를 좋다고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 말씀은 생각 없이 생각하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라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생각 좀 해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니 오늘 주님 말씀은 평화 가운데서 지켜야 할 평화와 깨야 할 평화가 있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지켜야 할 평화와 일치를 보겠습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평화와 일치입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요 Unity in Diversity입니다. 성격 차이로 이혼한다고 흔히 얘기하듯 우리는 다르면 사랑할 수 없다고, 갈라질 수밖에 없다고 쉽게 생각하는데 실은 평화로운데도 다르고 달라도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남자와 여자 사이만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할 땐 다름을 극복하고 일치와 평화를 이루다가 사랑이 식었을 때 다름을 핑계로 싸우고 갈라서는 것이잖아요?
둘째로 같은 목표로 인해 이루는 일치와 평화도 지켜야 할 평화와 일치입니다. 물론 이때 그 목표는 나쁜 목적이 아니라 공동선이 목적이어야겠지요.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평화. 하느님 뜻이 우리 공동의 목표인 그런 평화와 일치를 무엇보다 이루어져야겠지요.
서로 다른 목표를 조정해 가며 같은 목표를 가지는 것도 인간적으로 훌륭하지만 주님 뜻이 공동 목표이기에 서로 다른 목표가 아예 없는 것이 신앙적이기에 더 훌륭하고 이런 평화와 일치를 우리는 절대 깨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정작 말씀하신 것은 깨야 할 일치와 평화입니다. 나쁜 목적으로 하나 되고 평화로운 관계는 깨야 한다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같이 사기 쳐서 이익을 나눠 먹는 그런 일치와 평화 관계인데 간혹 사기 칠 때는 한통속이다가 나눌 때 더 많이 가지려다 깨지곤 하는 그런 일치와 평화입니다.
깨야 할 두 번째 일치와 평화는 비겁한 평화입니다. 앞에서처럼 나쁜 목적에 한통속은 아니고 불의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관계가 나빠지고 깨지는 것이 두려워 눈을 감는 비겁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눈을 감는다고 불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엄연히 있기에 이런 불의한 한통속과 비겁한 평화를 불태우는 불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인데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라는 집회서 말씀처럼 그는 진정 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그는 거짓 예언자 450명과 카르멜산에서 겨룰 때 위에서 불을 내려 거짓 예언자들의 제물을 다 불살라 버리고 그들을 다 쳐 죽였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그로 인해 죽음의 위협이 닥쳐올 때 두려워 도망쳤지요.
그렇습니다. 두려움을 불태우는 불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내 안에서 솟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위에서 내려온 불이 내 안에서 솟는 것이고 이것이 성령의 불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는 약하고 비겁하지만 성령으로 불타오르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말씀의 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불을 지르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죄를 불살라 태워버리는 십자가의 세례’를 통해 이루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 나는 것을 막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쑤 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세례’로 지상에서의 전도활동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거짓된 자신과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맞서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그런데 어찌하여, 친히 ‘평화’를 주신 분(루카 24,36)이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세상이 거짓 평화에 물들어 있고, 그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분열’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이요, 어둠으로부터 오는 분열이 아니라 빛으로부터 오는 분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칼’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이토록, ‘말씀의 불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다름 아닌,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참 평화로 이끄는 이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독해지면 뜨거워진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섬뜩할 만큼 강렬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은 세상을 당신 사랑으로, 성령의 힘으로 완전히 불태워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작에 불이 붙으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장작이 말라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불쏘시개가 있고 거대한 불씨가 있어도, 장작이 축축하게 젖어있으면 연기만 피어오를 뿐 결코 활활 타오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르러 오신 성령의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불이 내 안에서 타오르게 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마른 장작'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가득한 세상의 물기, 육체의 물기를 빼내는 작업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되어, 육이 살고자 하면 영이 죽고, 육이 죽어야 영이 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말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단식과 같은 극기입니다. 나를 '독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1학년 때, 사순 시기를 맞아 큰맘 먹고 일주일 단식을 결심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굶으셨는데, 일주일쯤이야 못하겠나 하는 젊은 혈기였지요. 하지만 배고픔은 생각보다 지독했습니다. 결국 이틀 만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한심해서 성당 바닥에 엎드려 있는데, 바로 그때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전부를 주었다.”
고작 이틀 굶은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주님께서 만나주셨을까요?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저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 식욕을 '독하게' 끊어내며 제 자신을 말리려 했던 그 작은 노력, 그 틈새를 주님께서는 놓치지 않으셨던 겁니다. 젖어 있던 제 영혼에 잠시나마 물기가 마르는 그 순간, 성령의 불씨가 제 마음에 ‘착’ 하고 내려앉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토록 독해져야 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그냥 좋은 기운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듯, 그분의 거룩한 생명이 들어오시려면 내가 주인 행세하던 나의 옛 생명이 죽어야만 합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 날뛰는 한, 성령의 불은 결코 붙을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세상의 성공에서도 똑같이 발견됩니다. 가수 비, 정지훈 씨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독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배고픈 게 제일 무서워요. 그래서 독해졌어요."
그를 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피'였습니다. 지독한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하시던 그의 어머니는, 온몸이 퉁퉁 붓고 심지어 목에 인슐린 주사 바늘을 아홉 개나 꽂은 채로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셨습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피눈물을 삼켰고,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모질었고, 아들이 성공하기 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살던 집마저 불타버렸습니다. 그 잿더미 위에서, 그는 어머니의 희생과 피를 가슴에 새기며 다짐했습니다.
"어머니가 못다 한 삶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겠다."
그 어머니의 피, 그 희생이 아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고, 그는 정말 독하게 춤추고 노래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피'가, 아들을 '독하게' 만들었고, 그 독함이 마른 장작이 되어 성공의 불을 붙인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바로 이 영적인 독함의 결정체입니다. 위대한 학자이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예로니모 성인을 보십시오. 그는 젊은 시절 로마에서 화려한 생활을 즐겼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갈망과 육적인 욕망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수난 때문에, 이 내면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독한 결심을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리아의 사막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벗은 오직 전갈과 들짐승뿐이었다. 나는 날마다 눈물 흘리고 한숨지었으며, 주님께서 내게 평화를 돌려주실 때까지 바위 위에 내 몸을 던졌다."
그는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돌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육신의 욕망이라는 물기를 완전히 말려버리기 위해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독하게 죽이고 또 죽였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그의 영혼에 성경 번역이라는 거룩한 불을 붙여주셨고, 그 불은 '불가타 성경'이 되어 천 년이 넘게 서방 교회를 밝히는 빛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뒤, 두려움 속에서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모아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그들은 세상으로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독하게 기도하며 자신들을 말렸습니다. 목숨을 내어놓는 그 독한 결단 위에, 마침내 성령의 불길이 혀처럼 갈라지며 내려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의 불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 육신을 죽이는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 8,13)
성령의 불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 적당히 타협하는 미지근한 삶에는 결코 붙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즐기는 것, 나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십자가에 못 박는 독한 결단이 있을 때, 바로 그 마른 자리에 성령의 불이 임하십니다. 오늘, 내 안에서 말려 없애야 할 물기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끊어낼 독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긍정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의 가장 믿을만한 원천으로 ‘관계’를 꼽습니다. 그의 행복 연구에서 긍정 정서를 자주 경험하는 사람의 88%가 인간관계를 핵심 요소로 꼽았다고 보고 합니다. 관계가 무너지면 삶의 만족도도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가족 안의 관계가 깨졌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오랜 친구의 배신으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이때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행복의 정반대로 나아갈 뿐입니다.
사실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할 때, 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의 한자어를 보면, ‘인(人)’은 두 개의 획이 서로 지지하며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간(間)’이 의미하는 사이는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된 좋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행복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깨는 데 집중하면 됩니다. 그러나 행복하길 원한다면 관계에 주목하고 잘 형성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인가 얻기만을 청한다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가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만 계속 내게 무엇을 청한다면 과연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가까이하기에 힘든 불편한 관계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주님과의 관계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화범이라고 자신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불’은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서 죄를 태우는 심판과 정화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즉 복음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기존 가치관과 질서에 도전하며, 거짓과 불의를 태우고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불은 ‘회개’로 사람들을 이끌며, 받아들이는 이와 거부하는 이를 가르는 심판의 역할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거부하시는 평화는 거짓된 타협이나 불의를 덮어두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불’인 복음은 진리 그 자체이기에 필연적으로 세상의 어둠, 죄, 거짓과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복음에 대한 응답은 이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보다 상위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름으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관계 역시도 주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는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지킬 의무가 있다(제인 구달 ).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불타오르는 단풍과 복음의 불은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사랑의 참된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우리의 죄와 무관심을 태워 없애십니다. 또한 우리의 거짓된 평화를 태워버리십니다. ‘태워버릴 것’과 ‘지켜야 할 것’을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진실된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불은 우리존재를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의 현존과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불은 두려움의 불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은총의 불입니다. 미움의 불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창조의 불입니다.
우리의 참된 자아를 드러냅니다. 복음의 불은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옮겨지는 불입니다. 이 불이 타오를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무관심과 타성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불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단풍이 마지막 빛을 태워 세상을 붉게 물들이듯, 우리도 불을 따르는 사랑의 삶이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그 불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 안에서 빛나는 삶입니다. 타오르는 불은 사랑으로 끝까지 타오르는 생명의 빛나는 불입니다.
루카복음 12장 5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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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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