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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5/0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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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소서.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성령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5월 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9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9,1-20)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오늘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사도 9,1-20
오늘 제1독서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6,52-59
오늘 복음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9일
조정래 시몬 신부
새 교황을 위한 기원 미사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10:2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사울의 회심 이야기

오늘 독서는 사울의 회심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사울은 예수님을 뵌 적이 없을뿐더러 믿지도 않았지만, 박해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을 박해하였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박해받은 그리스도인들과 같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해야 이 같이 다른 이와 자신이 같다고 여길 수 있을까요? 제아무리 부모님을 사랑하는 효자여도, 또 금실 좋은 부부라 해도 이처럼 여기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어쩌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내리사랑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예수님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이 박해하였던 그리스도인들과도 새롭게 만난 것입니다. 그 정점에 하나니아스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는 사울이 박해자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예수님의 명에 따라 사울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고쳐 줍니다.

그는 사울을 “형제”(9,17)라고 부르고는 안수합니다.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그가 새롭게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눈, 소중한 이웃들을 함부로 판단하였던 눈이 치유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신과 하느님(예수님)의 관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 삶 전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새 세상,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인생을 만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엎어진 김에 회개하는 은총

마침내 아니, 드디어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울의 회개 사건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는데 저는 오늘 사건의 시작이라고 할 그의 엎어짐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사울은 엎어졌습니다. 그런데 전의 공동 번역은 사울이 엎드린 것으로 나옵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개신교 성경은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하며 볼 때 지금의 우리 번역이 제일 잘 된 번역 같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엎드린 것이 아니고 무엇에 의해 엎어진 것이 맞습니다. 절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자발적으로 엎어지는 자는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러니까 원해서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좌절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가다가 엎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의 경우를 보면서는 그가 부럽고, 다른 한편 한 번도 엎어진 적이 없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부러운 이유는 그가 엎어진 것이 하느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못된 인간 때문에 엎어졌다면 사울은 무척 분해할 것이고, 그런 엎어짐을 제가 부러워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저는 하느님에 의해 엎어진 적이 없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저를 한 번도 고꾸라트리신 적이 없고, 제게는 그런 은총 곧 ‘엎어지는 은총’을 주신 적이 없는 것일까요?

왜 없겠습니까? 제게도 엎어지는 은총을 주셨고 또 누구에게나 주신다고, 믿는 것이 저의 믿음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사울과 제가 다르고 그래서 부끄러운 것은 그는 회개를 완성했고 저는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회개의 은총을 제가 완성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렇지요. 사울뿐 아니라 프란치스코와 다른 성인들이 저와 다른 점은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회개의 은총을 완성한 점이고 그래서 그들은 저와 달리 성인들입니다.

엎어지는 은총까지는 그들과 같이 받았는데 회개하는 은총은 결과적으로 제가 걷어찬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회개의 시작을 하긴 했지만 적당히 하고는 그만둠으로써 결과적으로 걷어찬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라고 한 다음 이전에 쓴맛이었던 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그래서 얼마 있다가 세속을 떠났다고 유언에서 얘기합니다.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라고 세속은 얘기하는데 엎어진 김에 회개하라고 영성 생활은 얘기하고, 사울과 프란치스코는 그 모범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그 크신 사랑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다툼이 벌어진 유대인들에게 이르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요한 6,54-5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건네시는 이 크신 사랑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요한 6,55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오늘 제가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삼위일체 신비의 실현인 성체성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성체성사로 삼위일체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을 먹으라는 말씀을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삼위일체의 첫 번째 신비,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을 아드님께서 받아 새 생명을 가지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의 세례 때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는 성체가 피로 변해서 성무일도 종이에 흡수되어버리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종이는 생명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체를 받아들임으로 생명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다른 종이들은 버려져도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체를 영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 때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는 남편이 피땀 흘려 밖에서 돈을 벌어서 아내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돈은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먹을 것을 사서 자신도 먹고 남편도 주고 자녀들에게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이 예수님 세례 때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모든 것이겠습니까? 이렇듯 성령은 하느님의 생명이자 모든 것, 곧 신성을 의미합니다.

성체가 종이에 흡수되면 그 종이 안에 머무는 것처럼 이제 가진 돈을 다 내어준 남편은 아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아내가 재워주고 먹여주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 전부 줄 수 없다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상대에게 맡겨 그 안에 머무는 일이 아버지가 아드님께 하신 것이고, 남편이 아내에게, 그리고 사제가 신자들에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제 어떻게 아내가 남편에게, 아드님이 아버지께, 신자들이 신부 안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예수님은 삼위일체 신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가 아드님께 생명의 성령을 주셔서 아드님 안에 머무는 것을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성모 마리아 안에 머물게 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드님께서 아버지 안에 머무시게 될까요? 바로 ‘아버지의 뜻’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여기서 ‘계명’은 아드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입니다. 생명을 내어준 이의 뜻에 머물면서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을 품에 안으셨지만, 동시에 하느님 안에 머무시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은 밀떡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인들 안에 들어가 그들도 커다란 성체로 만들어야 하는 뜻을 지닙니다. 만약 성체가 자유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발이 달려 다른 곳으로 도망 다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체이기는 해도 쓸모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안에 들어가 죽지 않는 신자 또한 스스로 버려진 성체와 같아집니다. 생명을 받은 이는 ‘순명’으로 그 생명을 준 이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땅에 보물이 있다고 두 아들에게 준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한 아들은 땅을 다 파 보았지만, 보물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 땅을 팔아버렸습니다. 다른 아들은 어차피 땅을 파는 것,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땅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땅이 전부였습니다. 두 아들에게 주었지만, 한 아들은 그분의 계명을 따르지 않아 아버지의 전부와 같은 땅 안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야곱에 에사우의 땅에 살기 위해 올 때 마치 에사우가 살았을 것처럼 살아서 그 열매를 가져와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에사우의 땅에 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버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고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어떻게 한 분 안에서 이 교환의 신비가 일어나겠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자 구분되는 세 분이십니다. 세 분이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생명을 아드님께 주십니다. 그렇게 성령님을 통하여 아드님은 생명을 가지게 되고 아버지는 아드님 품에 머무시게 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드님은 아버지 안에 머무시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순종을 통해 아드님은 당신 생명을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봉헌합니다. 아드님은 이렇게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다 내어줌과 순종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 자녀인 것과 같습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체성사를 통해 자신도 세상에서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켜야 하는 순종의 의무를 다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성체성사의 효과를 잃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성체성사를 통한 삼위일체 신비의 교리의 복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다음 중에서 신부들이 힘들어하는 미사는 무엇일까요? 
 
1) 어린이 미사 2) 청소년 미사 3) 성인 미사
 
지난 동창 모임 때, 특수 사목에 오랫동안 있었던 신부가 말합니다. 
 
“나는 이제 어린이 미사를 못할 것 같아. 아이들 코드를 전혀 모르겠어.” 
 
모든 미사가 다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순서를 고른다면 단연 첫 번째는 청소년 미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인 미사, 마지막으로 어린이 미사가 제일 신나고 재미있습니다. 이는 대상자들의 반응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행동 하나에게도 크게 웃고, 성인은 그래도 약간의 미소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청소년은 아예 보려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 미사에서는 어린이들의 반응이 좋다 보니, 목소리 톤도 더 올라가고 몸짓도 좀 더 과장되게 합니다. 이 미사에 나오는 어른들도 힘을 얻는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하지만 청소년 미사에서는 학생들이 저를 보려고 하지 않으니 저 역시 점잖게 미사를 하게 됩니다. 뒤에 앉아 계신 어른들도 점잖아 지십니다. 
 
자기의 반응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내가 기쁘면 옆의 사람도 기쁨을 느끼게 되고, 내가 슬프면 옆의 사람도 슬픔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그치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쁨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기뻐야 합니다. 평화를 전달하려면? 내 안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삶을 전달하려면?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그 말씀은 어제 복음에 나왔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입니다. 이 말씀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라고 투덜거렸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하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구원 소식을 헛소리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싫으면 마라.”하고 외면하면 될 것 같은데,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 구원이 정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지금처럼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사랑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들의 비현실적 기준에 당신 자신을 끼워서 맞출 수도 있겠지만, 이를 무시하고 당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는 데 집중할 수도 있다(제프 자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로를 먹고 마시면서 오만할 수 없는 우리의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시간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가장 참된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생명이 되시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떠나도 참된 사랑은 남습니다.

참된 생명은 참된 사랑으로 우리의 생명을 돕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진정한 감사이며 삶의 기본임을 배웁니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완성은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는 참된 일치입니다.

참된 일치는 참되신 하느님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생명으로 생명을 돕는 감사의 날 되십시오.

 

 

 

요한복음 6장 5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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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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