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알렐루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보내시어 성자의 신성을 힘껏 변호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보호로 기뻐하며 하느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사랑하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5,34-42)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 오늘 복음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사도 5,34-42
오늘 제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요한 6,1-15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2일
이상진 아모스 신부
✚ 성 아타나시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7
✚ 강론시작 08:37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예수님께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6,7) 하고 대답합니다.
그때 곁에 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6,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빵과 물고기를 가진 아이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주시는 모습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이를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돈을 건네며 부족하면 돌아와서 갚을 테니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장 참조) 말입니다.
아울러 이 빵 또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와 성체성사로 드러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능력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주려 한다면 늘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내주기 시작한다면, 나의 시간과 사랑, 관심과 돌봄의 손길을 건네기 시작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웃음과 행복의 꽃이 피어나겠지요.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요한 6,13)라고 전합니다. 이는 십자가와 성체성사로 드러나는 예수님과 우리 모두의 부활을, 그 충만한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식별과 인간적 판단 사이에서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은 다윗과 함께 제 신앙생활의 사표(師表)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때가 많잖아요? 신앙 따로 신앙생활 따로라는 말인데 다윗과 가말리엘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 다닐 때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에 아비사이가 시므이를 쳐 죽이겠다고 나서니 다윗은 이렇게 답하지요.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다윗은 이렇게 하느님과 무관하게 인간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사람과 일을 하느님과 연결을 지어 생각하고 대응하는데 다윗의 이것이 우리의 모범이 되느냐 그렇지 않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와 삶이 인간적이냐, 신앙적이냐가 갈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제가 저주받거나 모욕받는다고 생각될 때면 다윗의 이 모범을 생각하며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응하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오늘 행동도 제 영적 식별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영적으로 식별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 역시 신앙 따로 신앙생활 따로입니다.
먼저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늘 식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또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사실 이 면에서 요즘 와서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많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물을 마시며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이 하느님 뜻일지 아닐지 생각지 않는 것만큼이나 자주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식별하지 않고 일을 시작하고 행동하고 대처하곤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자주 영적으로 식별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판단합니다. 사실 그렇지요. 영적으로 식별하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나는 영적 식별과 인간적 판단 가운데서 뭘 하며 사는 사람인지 돌아봐야겠고, 가말리엘을 사표 삼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라는 반성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바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곧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본 모자란 것이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6,9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캐오처럼 성체를 영하라.
오늘부터는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이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40년 동안이나 하늘에서 내려 백성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성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주시는 당신 살과 피입니다. 광야에서 이 양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책 출판이 허가되었습니다. 제 책은 아마 7월 전후로 나올 것 같습니다. 제목은 『사랑하는 조카들이,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신자가 요즘 냉담이라는 말은 잘 안 쓰고 ‘쉬는 교우’라는 말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쉬운 교우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을 어떻게 쉬겠습니까? 그건 죽고 싶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쉰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현대 성체 교리의 문제점입니다.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알려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기 직전까지도 만나를 찾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보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는 일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성체를 영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일어납니다. 이를 잘 표현하는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픽사 단편 애니메이션 ‘바오!’입니다.
애니메이션 ‘바오’는 자녀가 떠나간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듯한 한 중국계 캐나다인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외로움 속에서 만두(바오)를 빚던 중, 자신이 만든 만두 하나가 아기처럼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어머니는 이 작고 귀여운 만두 아기를 실제 아들처럼 여기며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이는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참된 양식) 대신 다른 것을 갈망하듯,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만두 아기에게 집착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만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세계를 원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서양인 여자친구를 데려와 함께 집을 떠나려 합니다. 어머니는 또다시 자식을 잃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상실감에 휩싸입니다. 아들이 떠나려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으려는 절박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그 만두 아들을 한입에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는 강론에서 지적하듯,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양식’(성체)을 받아 모시지 않을 때,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변 사람, 특히 가장 사랑하는 이의 삶과 자유마저 집어삼키려 드는 왜곡된 사랑, 즉 '사람을 먹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음을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만두 아들을 먹어버린 직후 엄청난 충격과 슬픔, 후회에 빠집니다.
영화는 이 사건이 어머니의 깊은 내면과 두려움이 투영된 일종의 악몽이었음을 보여주며, 실제 아들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 준, 참된 양식(하느님의 사랑, 관계의 건강한 거리)이 부재할 때 사랑이 어떻게 집착과 소유욕으로 변질하여 상대를 '잡아먹는' 행위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성체를 통해 참된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것이 왜 우리 신앙생활과 인간관계에 필수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화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이사하는 데 못 쓰는 물건들이 상당히 많은데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젠가는 다 쓸모가 있다고 하시면서. 불안한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들이 없어도 언제든 새로 사줄 수 있는 존재로 남으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건을 먹고, 재물을 먹고, 나중에 사람까지 먹는 일이 없어집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평화는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양식’을 주시는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성체성사를 해야지, 세상 것에 대한 배고픔을 더 가중하는 욕구를 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서서히 어떤 것들은 버려도 된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많은 발전을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가 더욱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참다운 성체성사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의 목적이 모르고 성체를 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마음의 배를 채우는 일입니다. 언제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이 사라지니 사람이 ‘나쁜 놈’, 곧 ‘나뿐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카인이 그랬고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허무하고 불안한 열매처럼 나무 위에 위태롭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고는 모든 재산을 다 내어주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효과가 되어야 합니다. 자캐오처럼 성체성사를 영해야 모기에서 예수님처럼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2023년 미국공중위생국장 비벡 머시는 ‘외로움과 고립의 유행병에 관한 권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돈독한 사회 연결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다면 “개인 및 집단 건강에서 점점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외로움과 고립이 유행병처럼 퍼지고 있다면서 이것이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외로운 사람들이 감기에 더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또 흡연, 과음, 운동하지 않는 것보다 더 사망 위험을 늘리는 요소로 밝혀지기도 했지요. 따라서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건네주고 다가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다가오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서서 말을 건네주고 다가서는 것이 더 쉬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자기 돌봄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곧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병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에서 벗어나야 진짜 선물을 자기에게 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만 손해 보고 있어. 너무 억울해.’, ‘남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나만 잘되면 되지.’
커다란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 역시 나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스스로 외로움과 고립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때 풍성한 은총과 사랑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군중이 다가왔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장정만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지요. 필립보는 불가능하다는 듯이,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봉헌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보리 빵과 물고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습니다. 즉, 이를 봉헌한 아이는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집의 아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됩니다.
만약 자기 혼자 먹으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자기도 넉넉하지 않다면서 꼭 움켜쥐었다면 과연 예수님의 기적이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눔과 봉사로 이루어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 나 자신이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매년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매일 조금씩 삶은 복잡해져 간다 (요시모토 바나나, ‘어른이 된다는 건’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월의 밥상을 우리에게 차려주십니다. 사랑을 먹여 주십니다.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삶은 따뜻한 은총이 됩니다.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으니 성체성사는 생명의 길이 됩니다. 생명의 길에는 작은 조각의 넘치는 사랑도 많습니다. 작아서 못 보았던 것들을 다시 보고 만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먹습니다. 삶에서 만난 모든 것들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은총이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밥은 그냥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사람의 사랑으로 사람의 정성으로 차려지는 사랑의 밥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이며 실천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생활로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오월의 일상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위대한 사랑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모두가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요한복음 6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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