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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2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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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여라. 너희는 그 젖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해마다 파스카 축제로 저희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시니 더욱 풍성한 은총을 베푸시어 물로 깨끗해지고 성령으로 새로 난 이들이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2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7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 제 2독서
    (묵시 1,9-11ㄴ.12-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 오늘 복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사도 5,12-16
오늘 제1독서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묵시 1,9-11ㄴ.12-13.17-19
오늘 제2독서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20,19-31
오늘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7일
박홍철 다니 신부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16: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고백하는 믿음은 부활의 기쁨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누리는 열쇠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간 첫날 저녁, 최후의 만찬을 나누었던 큰 이 층 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전합니다(루카 22,12 참조). 해가 이미 저물어 버린 그때는 진정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어 두려움에 싸인 제자들의 마음이 어두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하고 인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적인 인사말을 건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1,2) 계신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그대로 이루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평화를, 십자가의 희생 제사와 부활로 이루신 구원과 화해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고, 베드로는 그분을 모른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지도, 그들에게 서운해하시지도 않고 그저 평화를 주십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시어 그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기뻐[합니]다”(20,20).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살게 하신 것처럼(창세 2,7 참조)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생명을 다시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쁨을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뵌 제자들은 이 모든 은총의 선물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에게도 가장 고귀하고 최고로 좋은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으로 고백하는 믿음은 부활의 기쁨과 평화 그리고 생명을 누리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각별한 사랑 그러나 공동체적인 사랑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제자들이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를 주시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라고 합니다.

며칠 전 말씀 드린 바 있는 ‘두려움과 기쁨’의 부활 체험을 제자들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 공동 부활 체험에서 빠진 제자가 있으니 토마스입니다. 토마스만 어디 갔었는지 이때 제자 공동체와 함께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어쩌면 절망과 두려움 때문에 공동체를 이탈해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토마스가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모두가 경험한 부활 체험에서 자기만 소외되었고, 그래서 엄청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이 봄철에 모든 나무가 꽃을 피우며 뽐내는데 나무 한 그루만 아직 봄을 만나지 못한 듯 꽃을 못 피우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일지라도 체험에서 빠진 그는 지금 삐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기뻐하며 자기들은 주님을 뵈었다고 자랑하고 있을 때 내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토마스의 말은 토마스가 이런 심사에서 하는 볼멘소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토마스에게 오늘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 주십니다. 저는 오늘 이점을 톺아보고 싶습니다. 토마스 개인에 대한 주님의 따듯한 사랑이랄까, 공동의 부활 체험에서 제외된 사람이 하나라도 없도록 하려는 주님의 각별한 사랑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겨울 같이 식사하지 못한 한 자식이 찬밥 먹을까 봐 따듯한 밥을 아랫목 이불속에 놔두었다가 내주는 것과 같고, 나가 있느라 받지 못한 알사탕을 아빠가 간직했다가 딸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니 토마스의 불신이 눈 녹듯이 녹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토마스의 불신을 녹여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많은 불신과 의심과 의혹이 이런 것이고, 주님께 대한 많은 원망과 투덜거림도 다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투덜거리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을 확인하면 이내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뜻하지 않게 주님 사랑을 따로 또 특별히 받은 셈이고,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하지 못한 특별한 신앙고백을 하는데 이것이 우리 신앙 공동체가 해야 할 신앙고백의 모범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니까 토마스가 이렇게 개인적으로 고백한 신앙고백을 우린 “우리 주님, 우리 하느님”으로 바꿔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주님은 부활 체험에서 빠진 토마스에게 따로 특별히 나타나신 것이고, 이런 주님의 각별한 사랑은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 길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주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실제로 공동체가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똘똘 뭉친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랑을 오늘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풀자.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일들, 곧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거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나며, <화답송>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이들이“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노래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주며, <복음>에서는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시어,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곧 당신의 생명이신 성령을 건네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곧 신뢰로 사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을 넘어 성령으로 용서하셨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우리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졌고,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단지 용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한 후에도 여전히 그를 걸머져주며, 짊어져주고 덮어주고 기도해주고 ‘위해’주는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그토록 부활을 불신하고 있는 자신을 이미 환히 알고도 믿고 용서하시는, 찾아와주시고 사명까지 맡기시는,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짊어져주고 걸머져주시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그는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 ‘사랑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27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복 탄력성에 이르는 방법과 부활에 이르는 방법은 같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시는 내용이 복음으로 나옵니다. 왜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따로 나타나시지 않고 여드레나 기다리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토마스가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머물 줄 알았고 보상을 받았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믿음이 부족한 사도라는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만큼 부활에 대한 갈망을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방법이 있고, 이 방법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방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김주한 교수가 말하는 ‘회복탄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 서두에는 전신마비라는 극심한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삶을 이어간 한인 지질학자 이상묵 교수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상묵 교수는 45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야외 지질조사를 수행하던 중 차량 전복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라는 중대한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일상생활에 복귀하는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보였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마치 고무공처럼 튀어 올라 회복되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 회복탄력성을 모두가 가진 것은 아닙니다. 마치 유리공처럼 바닥에서 부서져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상묵 교수는 어떻게 스스로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과연 혼자 힘으로 가능했을까요?

김주환 교수의 책에는 회복탄력성 이론이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실험이 소개됩니다. 바로 1955년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약 700명)을 대상으로 40년 가까이 추적한 종단 연구입니다. 이들 중 약 1/3(약 200명)은 출생 시 합병증, 극심한 가난, 부모의 불화나 정신 질환 등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 자라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고위험군 아이들이 대부분 문제아로 성장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이들 중 약 1/3(고위험군 전체 중, 즉 약 70명)은 역경을 딛고 유능하고 안정적인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 아이들을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 중에서도 특히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합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았던 아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받아주며 사랑해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아이에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었다는 점입니다.

이상묵 교수에겐 그를 믿어주는 공동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행운이라고 말합니다. 사고 직후부터 병간호, 재활 과정, 그리고 일상생활 적응까지 아내의 헌신적인 돌봄과 정서적 지지가 없었다면 회복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자주 언급됩니다. 서울대학교 측에서는 교수님의 복귀를 위해 연구실 및 강의실 환경 개선(휠체어 접근성 확보 등), 보조 공학 기기 지원 등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교수직을 유지하고 연구 및 강의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이상묵 교수님이 연구와 강의를 재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입으로 조작하는 특수 마우스와 같은 보조 공학 기기입니다. 이러한 기술의 개발과 적용, 그리고 교수님에게 맞게 기기를 설정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지원한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의료진과 재활 전문가들, 그리고 제자 및 학생들의 격려와 도움이 컸습니다. 이 안에서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고, 그 믿음대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의 믿음 안에 머무는 일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전에 ‘이승복’ 박사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로 올림픽 출전까지 할 수 있었지만, 연습 중에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이상묵 교수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선교사가 “당신에게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는, 그 믿음에 머물려고 합니다. 손가락을 움직여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존스 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 전수됩니다. 아주 천천히. 그래서 어떤 믿음을 가지려면 그 공동체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절망에 늪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 가운데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았지만,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믿고 싶어서 머물 줄 알았고 일주일 동안 다른 사도들의 믿음이 그에게 스며들어 결국엔 부활한 예수님을 뵙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여인들이나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당신 사도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믿음이 교회의 성직자들 안에 모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성직자들 안에 머물면 그 믿음이 전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빛에 눈이 익숙해져, 완전한 빛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많은 순교자들이 있지만, ‘마리아 고레티’ 성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죽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수십 번 찌른 알렉산드로를 용서하고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뒤 감옥에서 분노와 증오에 싸여 있는 알렉산드로에게 나타나 그를 회개시켰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천국에서 온 마리아 고레티를 보았고 그 부활의 믿음 안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굳은 일을 하며 평생을 보속하며 홀로 살았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게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하는 존재들이니까, 굳이 생존을 위해 돈과 명예나 육체적 욕망을 채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복탄력성이 그렇듯이, 믿으면 믿는 대로 됩니다. 부활도 부활을 믿는 공동체에서 견디며 머물면 믿는 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승리’를 말하면 떠올려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메달, 시상대, 환호, 최고, 경쟁자 물리치는 것, 함박웃음, 불끈 쥔 주먹, 만세…. 그렇다면 승리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승리가 성공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승리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승리가 곧 성공이 아닌 사례는 참으로 많지요.
 
투르 드 프랑스에서 7연패의 금자탑을 세운 랜스 암스토롱이 있습니다. 그는 고환암 수술 이후 처절한 재활을 거쳐 투르 드 프랑스 7연승을 달성하며 인간 승리의 대명사격 존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도핑 검사 결과 적발되어 모든 우승이 박탈되고 말았습니다.
 
버즈 올드린도 생각납니다. 그는 아폴로 11호의 승무원으로, 닐 암스트롱에 이어서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이라는 목표에 도달한 뒤에 목표를 잃어버렸고,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자 알코올 의존증과 우울장애로 고생하며 이혼까지 했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를 중퇴했고, 스티브 잡스, 리처드 브랜슨은 학창 시절에 두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한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승리를 추구하는 세상이 망가진 인간을 만든다는 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이기는 것이 꼭 성공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승리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리게 됩니다. 죄를 이기고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겼다. 이제 됐다.”라고 말하면서 승리감에 도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세상 끝까지 울려 퍼질 수 있게 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의 승리를 좇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 역시 세상의 기준만을 생각하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예수님 부활을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을 들어서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8)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믿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승리를 좇고 있습니까?

 

오늘의 명언

누구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자기 자신에게서 다른 누구보다 훌륭한 길잡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자비안에 살면서도 자비를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慈悲)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자비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상처에서 신앙고백이 이루어집니다.

진실한 고백에서 자비가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상처에서 자비를 만납니다. 자비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자비입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자비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비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잊고 살았습니다. 자비의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상처 입은 자비에서 부활을 만납니다. 부활은 자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십자가의 상처에서 자비를 만납니다.

자비를 잃은 것은 부활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 세상을 바꾸십니다. 상처에 자비를 청하고 자비는 자비로 우리 죄를 모두 지워줍니다.

자비의 부활을 믿습니다. 의심으로 가득찬 우리 자아를 허무는 자비 주일 되십시오. 의심까지 믿음이 되게 하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자비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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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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