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당신 백성에 앞장서 나아가실 제, 그들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주실 제,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이 되어 쏟아졌나이다. 알렐루야.
하느님,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파스카 제사를 세우셨으니 간절히 기도하는 이 백성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사제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저희와 화해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저희를 용서해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5,27-33)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3,31-3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사도 5,27-33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 무렵 경비병들이
27 사도들을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 세워 놓자 대사제가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요한 3,31-36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일
박찬홍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45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충분하지 않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나누신 대화(요한 3,1-21 참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아드님이십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신데, 오늘 복음은 그 큰 빛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요?
그들은 마치, 해가 떠올라 세상이 환한데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방에 들어앉아 어둠을 쫓는다고 촛불을 켜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오랜 장마 뒤에 뜨거운 태양이 떠올라 대지를 산뜻하게 덥힐 때 창문을 활짝 열어 햇볕을 쬐는 대신, 문을 닫아걸고 굳이 보일러를 돌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제힘으로만, 제 잘난 것으로만 살 수 없는데도 자신의 부족함과 가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는 꼴이지요. 빛 앞에서 방어하고 저항하며, 자기 혼자서도 잘해 왔노라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 미약한 힘자랑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넘실거리는 은총의 바다를 앞에 두고 겨우 쫄쫄 흐르는 실개천인 자신을 뽐내며 하느님 앞에서 위세를 부리는 격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악하다’고 말합니다(3,19-20 참조). 그들은 생명을 보지 못하며,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3,36 참조). 이는 윤리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영적인 평가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자신은 충분하다며 더 받아들이고 배우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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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말합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왜 그럴까? 왜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졌다고 누구나 내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시는 것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의 신원과 그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곧 아드님(예수님)은 위에서 오신, 보내진 사랑입니다. 여기서, ‘위’ 혹은 ‘하늘’이란 단순히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상대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와 ‘오신 분’이라는 차이, 곧 본질적으로 다른 절대적인 차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태어난 이”가 아닌,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오신 분”, 곧 태어나지 않은 영원한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분, 곧 우리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해를 넘어선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내면적인 응답만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을 그분께 바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곧 응답을 통하여 자신을 건네 드리는 실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게르하르트 로핑크의 “믿음의 재발견”).
곧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차원인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성실함’(믿음이나 성실함은 다 같이 히브리어 “에무나”를 쓴다)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의미로는 ‘순전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철저한 헌신을 토대로 하는 방향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credo)라는 단어 역시, 자신의 심장, 생명, 곧 자기 자신을 건네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cro;심장, 생명’+dare;주다).
그러기에,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인격적인 결속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서 행동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며, 실제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곧 ‘오신 분’이 이미 ‘와 계신 분’이 되고,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현재가 되고, 현세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생명을 살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에게서는 이미 신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필리 3,20)이 됩니다. 땅에서 부활의 기쁨을 사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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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3,31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주님!
항상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 머리 위에 올라
당신을 조정하지 않게 하소서.
제 이성 위에 지혜로 계시고,
제 판단 위에 자비로 계시소서.
오늘도 당신에 신비,
그 놀라움 우러러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2테살 3,10).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서 무작정 먹어서 ‘돼지’가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치히로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습니다. 그 값을 반드시 치러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그냥 돈으로 내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치히로는 부모가 돼지가 되어버리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름을 잊어버립니다. 그러자 몸이 조금씩 투명해집니다.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치히로는 자기 이름을 되찾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돼지가 된 부모를 되돌리기 위해서. 이것이 일의 중요성입니다.
오늘은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목수’라는 직업으로 소개됩니다. 그가 목수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일해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양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요셉에게 일이란 것이 예수님과 성모님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일에는 항상 ‘양식’이 따릅니다. 양식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일하셨습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왜 일하려고 하셨을까요?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 먹는 과일은 선악과가 됩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라고 말하며 일과 먹는 것을 연관시킵니다. 바오로에겐 먹는 목적이 생존이 아니라 일인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 됩니다.
왜 먹는 것과 일이 직결될까요? 양식 안에는 사명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튜브에 엄마들이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평소에 먹던 음식을 준비해서 몰래카메라로 식당에서 음식을 대접했을 때 자녀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의 음식은 피가 서려 있습니다. 그 피가 양식이 되게 합니다.
양식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합당한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은 정체성을 주고 정체성은 사명을 줍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도 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이유는 성체를 양식이 아니라 음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봉헌금을 냈으니 당연히 먹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봉헌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이지, 그것이 성체의 값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성체에서 말씀하실 때, “그럼 제가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성체는 당연히 일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이 단계까지 오지 못하느냐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 드리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제대로 영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식의 목적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뉴스에 경찰관이 불이 난 집에 홀로 계신 할머니를 구한 일이 나왔습니다. 마치 가족과 사회에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져 합당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에 보답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어지는 양식은 물론이요, 시간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에너지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그 사회에 속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먹으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갈 힘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들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것에 감사하다면 그 열매를 맺어야 당연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재능, 기회, 은총 = 일종의 '양식')를 가지고 수동적으로 있거나 숨겨둔 종과 달리, 이를 활용하여 '일하고' 이윤을 남긴 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그분의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할 책임(사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받은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일'을 강조합니다.
양식은 ‘어머니의 도시락’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왜 싸 주는 것입니까? 공부하라고 싸 주시는 것입니다. 도시락을 통해 자신이 어머니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정체성이 없다면 부모의 자녀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자녀입니다.
각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에 합당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둘을 거부하면, 먹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고,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 일하지 않아도 돼지처럼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타인은 지옥일까요?
한 가지 사회적 실험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20개의 지갑을 떨어뜨립니다. 이 지갑 안에는 돈과 명함이 있었지요. 이는 지갑 주운 사람이 주인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갑은 과연 얼마나 회수되었을까요?
사람들은 한 25% 정도만 회수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80%가 회수되었습니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지옥이 아닌 천국이 아닐까요? 어려움이 생겼을 때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어려움이 있을 때, 희생과 봉사, 나눔은 평소보다 더 늘어났습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당시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앞다투어 나눔을 실천했고, 봉사활동을 자처했습니다. 지난 의성-안동 산불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들이 하루빨리 산불이 진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북 산불 피해 긴급 모금에 참여했고,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부정적인 말에만 귀담고 있기에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본적으로 천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 증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5.36)
영원한 생명은 믿는 이에게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삶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삶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거부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삶입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반대편으로 가는 줄로 착각하고 혼자서 주님을 거부하고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믿는 삶,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은 우리가 소파에 앉아 손에 움켜쥔 채 행운을 비는 복권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서 문을 부수는 도끼 같은 것이다. (레베카 솔닛)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노동자 성 요셉은 노동의 참기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은 몸을 쓰고 땀을 흘려야 더욱 건강해집니다. 노동자 성 요셉은 구체적인 목수의 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습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소중한 우리의 노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발전시키고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노동은 맑은 생활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렇듯 노동의 가치는 우리의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인간 행동 하나하나가 노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노동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노동은 모든 삶의 기쁨이 됩니다. 노동자의 노동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이자 핵심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서로를 향한 진정한 감사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마음이 새로운 차원의 노동이 되게 합니다.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쁨과 감사의 날 되십시오. 하느님의 노동은 우리를 향한 창조이며 변화이며 보시니 좋은 참된 기쁨이었음을 믿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은 시들지 않는 참된 영성입니다.
요한복음 3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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