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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1/1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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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로우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별의 인도로 구세주의 탄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세주를 믿고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2025년 1월 10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월 10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5년 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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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요한 5,5-13
오늘 제1독서

 

성령과 물과 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루카 5,12-16
오늘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월 10일
권다혁 다미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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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온몸이 나병에 걸린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부정한 자로 여겨져 마을 바깥에 살아야 하는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5,13). 그러자 곧 나병이 나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상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지만 모든 병자를 고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성사적’입니다. 치유 기적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치유되기를 바라시고 또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듯이 그대가 모든 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3요한 1,2)라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영적 구원, 현세의 부귀, 건강이라는 세 가지 축복이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며, 이러한 삼중 축복(삼박자 축복)만이 참된 복음이며 복음의 진수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여정은 성사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하는 요한 묵시록의 다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4). 

완전한 치유와 위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뵙는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지상의 순례자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증거자가 될 것인가 떠버리가 될 것인가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가 믿음으로 한 청원을 흔쾌히 들어주시어 나병을 즉시 낫게 해 주십니다. 나병 환자의 믿음이나 청원에 나무랄 것이 없고, 주님의 치유에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이 이제 중요합니다. 그다음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사제에게만 가서 치유된 몸을 보이고 예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지 말라! 

이것에는 당신의 신성을 감추려는 뜻도 있지만 뒤에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하느님 치유의 증거가 되게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치유되었을 때 하느님 치유의 증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의사에게 가서 치유를 받았을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가 내 병이 치유되었다고, 어느 의사가 나를 치유해줘서 병이 치유되었다고, 떠들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 달려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의사를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자의 증거 방식입니다. 물론 의사에게도 감사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치유의 도구로서 역할을 잘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사이신 예수님도 당신이 고쳐준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고쳐주신 거라고,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말로 증거 하지 말고 몸으로 증거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역시 말로 하느님을 증거 하지 말고 존재로 증거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는 그동안 나병으로 받은 설움 때문에 내가 이제는 병이 다 나았다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치유해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 하기보다 자기가 치유 받은 것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은 다음 나병 환자가 어떻게 했는지, 주님 말씀대로 함구했는지 떠들고 다녔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문이 점점 퍼졌다는 것을 보면 나병 환자가 주님의 올바른 증거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 나병 환자의 치유 얘기는 나는 과연 하느님 증거자가 될 것인가? 나를 인정받으려는 떠버리가 될 것인가? 자문하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께 다가가야 하는 이유

오늘도 ‘주님 공현’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치유를 통해 예언자 ‘엘리사의 활동’을 완성함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2열왕기>(5,1-27)에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을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나병을 낫게 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직접 치유하심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병환자는 <민수기>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었고(민수 5,2-4),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이된 일인지,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엎드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깨끗하게 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레위 13,45-46), 나병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면 그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하물며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십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져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부정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져 깨끗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불결함에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마치, 호렙산의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처럼(탈출 3,2), 성모님께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신 것처럼, 불결한 이를 만지면서도 자신은 불결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당신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오, 사랑이신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5,13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
불순함으로 
제 온 몸이 부스럼투성입니다. 

죄와 상처로 속이 문드러지고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불결하기에 저는 망설이지만 
당신은 오히려 불결하기에 
다가오라 하십니다.

죄인이기에 저는 숨지만 
당신은 오히려 
용서받을 대상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제가 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은총을 얻기 위해 조건을 거는 일은 괜찮을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치유는 회복입니다. 그런데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은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장난 자동차를 원숭이가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만든 인간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는 인간은 앞으로 그 자동차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어진 법칙대로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병원에 가서 피부병약을 짓고 의사가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데 계속 마시겠다고 하면 약을 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해로워질 수 있습니다. 치유와 순종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로 엮여있습니다. 순종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치유와 같은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뜻에 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하면 치유가 더 빨리 일어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을 다는 게 굳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를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심으로 순종을 배울 자세가 되었다면 더 빠른 치유를 주실 것은 같습니다.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이자 군인이었으며, 1521년 전투 중 대포알에 의해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중상을 입으면서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붙자, 이냐시오는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절차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유를 포기하고 의사에게 순종해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긴 회복 기간에, 이냐시오는 오락거리를 찾았으나 집안에는 종교 서적만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성인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는 점차 깊은 영적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 강제된 고요함과 신체적 회복의 시간은 그에게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가 의료 권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치유되었듯이, 그의 영혼도 신적인 영감에 순종함으로써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속적 야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를 필요성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육체적·영적 치유의 이중 과정은 이냐시오에게 겸손과 권위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혁은 그를 예수회 창설과 영신 수련 집필로 이끄는 깊은 영적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냐시오의 경험은 고통 속에서도 순종이 어떻게 깊은 치유와 새로워진 삶의 목적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는 1202년,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약 1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풀려난 후, 그는 아시시로 돌아왔지만 심각한 쇠약과 병에 시달렸습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갈등도 겪었고, 자신의 과거 세속적 삶의 공허함을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의 『성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는 이 시기에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며, 자신을 치유해 주시고 삶의 목적을 명확히 해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의 자유, 야망,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조롱을 받아야 한다 해도 이를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치유와 율법의 준수는 하나입니다. 요한 9,1-7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치유해주시는데, 그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어야만 치유가 완성되게 해 주셨습니다. 치유보다 더 큰 목적은 순종을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2열왕 5,1-14에서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는 순종을 강요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게 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엔 거부하지만, 그 말에 순종하게 될 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히즈키야의 치유(2열왕기 20:1-11)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어야 할 운명인 히즈키야가 눈물로 청원하자 그의 생을 15년 연장해주셨습니다. 

치유의 과정은 곧 순종의 과정입니다. 만약 치유의 은총이 있고 난 뒤에도 순종보다는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면 치유가 은총이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치유를 원하기 전에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먼저 드립시다. 그러면 분명 더 빠르게 치유해 주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우울함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절대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사람의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그 부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 번째는 날라리입니다. 날라리는 즐겁게 사는 것에만 집중하기에 우울증을 모릅니다. 그래서 일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합니다.
두 번째는 뺀질이입니다. 뺀질이는 자기 사랑이 지독해서 남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만 즐겁고, 자기 몸만 편하게 됩니다. 당연히 일도 안 하고, 모든 의무와 책임을 거부합니다. 우울증을 앓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은 띨띨이입니다. 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사는 게 늘 즐겁습니다. 우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셋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사회생활이 괜찮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행복하지만, 주변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걸린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이 정신과 의사는 말씀합니다. 저 역시 때로는 우울합니다. 아마 저도 조금 괜찮은 사람인가 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병이 과연 100% 자기 탓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탓이 전혀 없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때로는 열심히 사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스스로 자책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안의 좋은 점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은 무조건 자기 탓이었습니다. 자기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고칠 수 없는 병의 경우는 아주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죄책감도 있었을 테고,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죄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책하고, 좌절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깨끗해지길 원하신다는 것, 따라서 주님께 나아가고 함께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실패는 좀 더 현명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

- 헬리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차고도 맑은 겨울 바람이 다시 아침을 엽니다. 하늘 나라의 깨끗한 소식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병고는 깨끗하게 됩니다.

고치지 못할 것이 없으신 하느님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치유로 아픈 우리는 깨끗한 기쁨을 다시 맛봅니다.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아픔까지 맡겨드립니다.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깨끗해지는 기쁨입니다. 깨끗한 복음의 길이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새로워진 삶입니다.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삶의 참맛은 지금부터입니다. 두려움을 빼고 절망을 빼면 다시 깨끗해지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없다면 우리의 생활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을 다시 깨끗이 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이 춥고도 맑은 오늘을 다시 기쁘게 기도하며 다시 기쁘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자신을 치유하십니다. 서로의 아픔과 고통을 깨끗이 치유하는 깨끗한 치유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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