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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9 (화) 성요셉대축일 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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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요셉에게 어린 시절의 구세주를 돌보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교회가 인류의 구원 계획에 충실히 봉사하게 하소서.

2024년 3월 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9일 (화) 성요셉 대축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사무 7,4-5ㄴ.12-14ㄱ.16)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 제 2독서
    (로마 4,13.16-18.22)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오늘 말씀 카드
    (로마 4,18)
    그는 희망이 없http://pieonane.com/2260#today어도 희망하며 믿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습니다. (로마 4,1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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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마태 1,16.18-21.24ㄱ
오늘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9일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 성 요셉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4

✚ 강론시작 11:08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

교회의 수호자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은 예기하지 못한 사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모범적으로 알려 줍니다.

먼저,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약혼’은,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이미 부부와 같은 신원을 가진 상태가 됨을 뜻하였습니다. 이 경우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면 율법에 따라 처벌(투석형)되었습니다(신명 22,21 참조).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면하게 하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거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요셉에게 ‘의로움’(정의)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언제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통하여 요셉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실천한 이들이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의로움(정의)의 구현은 믿음(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한마디 저항이나 이의 제기 없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묵묵히 실천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결코 힘없는 공허도 의미 없는 희생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진정한 존엄의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믿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고해성사의 효과는 정확히 이렇게 드러난다 .

제가 어렸을 때 뒤란에서 야한 여자 사진을 보다가 아는 형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둥그렇게 꾸겨서 담 밖으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형은 그런데 굳이 그것을 찾으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논은 그것을 잘 감추어 주어 그것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형이 찾았는데도 일부러 모른 척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그 일로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타인의 잘못을 덮어주는 논을 본받았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찾아내려던 동네 형을 본받았을까요? 이상하게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들추어 상처 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자녀는 그러면 자기 잘못보다는 자기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만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이미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음에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상대의 탓을 하였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 자체가 용서를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순결했다는 뜻입니다. 

자꾸 타인의 잘못을 드러내려 한다면 자신이 얻는 게 있어서입니다. 반면 드러내고 싶은 게 없다면 이미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았기에 굳이 남을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나도 아픕니다. 

요셉 성인이 약혼 중에 임신하고 온 아내를 보면서도 굳이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그러한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요셉 성인의 의로움이 이것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들추는 사람은 그것으로 반드시 얻는 이득이 있기에 타인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고집 센 사람 한 명과 똑똑한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집 센 사람은 4×7=27이라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4×7=28이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답답한 나머지 똑똑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가자고 말하였고, 그 둘은 재판관을 찾아가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재판관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본 뒤, 고집 센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4×7=27이라 말하였느냐?”

그러자 고집 센 사람이 말합니다.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놈이 28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그러자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7이라 답한 놈은 풀어주고, 28이라 답한 놈은 매질하여라!”

결국 고집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을 놀리며 그 자리를 떠났고, 똑똑한 사람은 억울하게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똑똑한 사람은, 매질을 당하는 내내 재판관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지만, 재판관은 그런 그의 하소연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4×7=27이라고 말하는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내 너를 매우 쳐서 지혜를 깨치게 하려 한다.”                              

왜 굳이 받아들이지도 않으려는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면서까지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할까요? 나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하는 틀린 면이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인을 굳이 심판하고 잘못을 드러내며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고해성사 직후’입니다. 이때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그 사실을 믿는다면 타인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내 죄를 용서받았음을 의심하게 된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또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자기를 정당화하게 마련입니다. 고해성사를 본 즉시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누구의 잘못도 들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됩시다. ‘굳이 남의 잘못을 들추어낼 때 내 맘만 괴롭게 되는 성 요셉과 같은 정결하고 의로운 상태’로 살아갑시다. 이것이 심판 앞에서 의로운 상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의 작은 일을 즐겨라. 어느날 돌아보면 큰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믿음도 사랑도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임을 요셉 성인을 통해 배웁니다.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의 뜻과 같지 않습니다. 믿음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갑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모습이 빚어집니다. 

고정된 시각을 내려놓으면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됩니다.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구원을 체험합니다. 구원은 함께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마리아의 옆에 선(善)을 지향하는 요셉이 있고 요셉의 옆에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아집의 벽을 허물면 받아들여야 할 사랑의 뜻이 보입니다. 성 요셉의 실천이 진정한 믿음이고 진정한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힘은 받아들임의 진실한 뜻과 진실한 실천입니다. 받아들이기 위해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사랑입니다. 이리저리 흩날리는 믿음과 사랑이 아니라 중심을 잡아주며 함께하는 일상이 중요합니다. 요셉 성인의 발걸음이 다시 힘찹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좋은 뜻 하나를 더 보태니 뜻의 가장 좋은 완성이 됩니다. 

발걸음을 비추는 받아들임의 가장 좋은 빛입니다. 받아들임의 가장 좋은 축복을 놓치지 않는 행복한 끌어안음의 사순되십시오. 끌어안음이 서로를 위한 끌어올림임을 믿습니다. 성 요셉이여 두려움이 아닌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믿음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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