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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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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하느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으로 온갖 복을 내려 주시니 저희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2024년 3월 18일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8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요한 8,10-11)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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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요한 8,1-11
오늘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8일
최상훈 유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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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여인’(수산나/간음한 여자)과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두 악한 존재들’(두 원로/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여인들을 구한 ‘두 의인’(다니엘/예수님)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수산나는 죄가 없지만 욕망을 품은 두 원로의 덫에 걸리고, 간음한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혀 죽을 위기에 놓입니다. 그러나 수산나가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자,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다니엘을 보내십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도 사람들에게 끌려 와 예수님 앞에 서게 되지만 오히려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치졸함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문장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가 얼마나 경탄스러운지 잘 드러냅니다. 먼저 “돌을 던져라.” 하는 말씀으로 율법을 존중하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라는 전제로, 누군가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상처를 줄 수 없음을 복음적 연민으로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에게는 가혹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졸함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덫에 희생되는 나약한 이들의 절규는 하느님을 움직입니다. 

약한 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는 권력자들이나 숨 막히는 잣대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율법 학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화답송).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뜸 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 그래도 될지 말지 답을 요구합니다. 

평소대로라면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이지만 이 경우만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기회라고 의기양양하며 빨리 대답하라고 좨칩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쏠려있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는 빨리 답해야 한다는 대단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쉽고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답하시지 않고 뜸을 들이십니다. 

제가 식당 주방일을 하다 보면 뜸을 들이기 전에 손님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급한 마음에 김을 빼면 밥이 덜 되거나 제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급하더라도 마음은 급하게 먹지 말고 뜸 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뜸 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는 뜸 들이는 이 시간을 가지지 않아 지나고 나서 이렇게 답하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대처하면 좋았을 걸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오늘 주님의 뜸 들이심도 이런 의미일까요? 자기 주도를 위한 시간 벌기!? 주님께서 뜸 들이신 의미는 분명 이것 이상이고, 우리의 뜸 들임도 이것 이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알기 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이렇게 우리는 답을 재촉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얼굴을 하느님께 향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다울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경우 소년 다니엘이 성령의 감도로 간음죄에 몰려 죽을 판인 수산나를 살판으로 바꿨는데 우리도 다니엘처럼 이렇게 성령으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것은 스테파노가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는 대신 땅에다 ‘하느님’ 이렇게 쓰고 계셨을 겁니다. 

그랬는데 그 하느님께서 ‘살려라!’ 하고 답하셨을 것이고, 살리는 방법은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죄 없으면 돌로 치라 하면 될 거라고 알려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이런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조급해하지 말고 뜸 들이고 당황하지 말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는데 급할 때 기도하고 급할수록 기도하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의 죄는 어머니가 낳을 때 그 흘린 피로 이미 다 씻겼다.

영화 ‘더 스토닝’은 이란에서 아직도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는 ‘투석형(投石刑)’을 소재로 한 실화입니다. 두 손목과 양팔이 뒤로 묶인 채, 도망가거나 피할 수조차 없도록 허리까지 땅에 파묻힌 상태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죽어가야 한다면?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들과 남편, 아버지와 친척 남자들, 평생 한 가족처럼 얼굴을 보고 지낸 마을 이웃들이 던지는 돌이라면? 안구의 핏줄이 터지다 못해 돌출되거나 머리뼈가 깨졌는데도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을 맞으면서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이 넷을 키우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소라야의 결혼생활은 남편의 폭력과 폭언 탓에 몹시 불행합니다. 자식들을 생각하며 힘겨운 결혼생활을 버티던 그녀는 14살 소녀와 결혼하기 위해 위자료를 주지 않고 이혼하기를 원하는 남편 알리가 꾸민 잔혹한 함정에 빠져듭니다. 간음한 여인으로 몰린 것입니다. 

그릇된 탐욕과 거짓은 들개 같은 사내들의 횡포로 이어지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담한 죄악은 집단침묵으로 뒤덮여 묻힐 뻔하지만, 나중에 책을 쓴 자흐라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힘입어 마침내 소라야의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 용서하는 방식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돌을 들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죄를 땅에 쓰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 손가락은 땅에 박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죄를 흙에 쓴 글자처럼 사라지게 하시기 위해 우리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신 순간은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시고 여인에게서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직후였습니다. 

나를 단죄하는 이가 없다면 나도 굳이 다른 이를 단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관은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탓을 돌렸듯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 안에 자기를 단죄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끄러웠고 이미 두려웠습니다. 자아가 바로 그들을 단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이유는 그 죄책감을 가리기 위해 방어기제 중 하나를 발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위 영화에서 알리는 위자료를 주기 싫은 것과 14살 소녀와 결혼하고 싶은 죄를 용서받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용서받았다면 소라야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알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않았기에 악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2018년 연말에 어머니를 살해한 30대 남성이 대법원이 징역 20년형을 확정했습니다. 38살 A 씨는 술에 취해 TV를 보다가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A 씨는 평소에도 잦은 음주 등으로 꾸중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꾸중을 듣는 과정에서 뺨을 맞은 A 씨가 급기야 어머니에게 의자와 흉기를 휘둘렀고, 의식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내버려 둔 채 달아나기까지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아들의 흉기에 찔린 어머니가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가라.”하고 말한 건데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을 걱정했던 겁니다. 전에 사망 보험금 노리고 지인을 시켜 차 사고 내 어머니를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호소한 노모도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는 내가 칼을 휘둘러도 죽어가면서 그 죄까지 가지고 가십니다. 자신이 낳은 존재이기에 그 책임을 자신이 껴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짓고 나에게 유일하게 심판하셔야 할 분이 나를 죄 없다고 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벌도 받고 죄책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더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책임으로 안고 대신 돌아가십니다. 부모는 낳을 때부터 그 피로 자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한 분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그 죄책감 때문에 이미 용서한 분을 찌르게 됩니다.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자녀를 낳을 때 자녀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피로 보속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에덴동산에서 뱀을 놓아주실 때 이미 죄지을 것을 다 용서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어 끝까지 하느님을 원망하고 칼을 들이댄다면 더는 구원을 희망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게임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인이니까 그냥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게임을 못하게 일일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 할까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요즘에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니 그냥 꾹 참고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까요?”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말하면서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편안한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답이 많은 세상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정확해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다면서,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가르쳤던 사랑은 어디에 있냐면서 또 다른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갑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억지를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혼자 그 자리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큰 억지이요. 여자 혼자서 간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사랑 없는 닫힌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사랑하는 법과 용서하는 법을 배우며 삶을 완성해 간다.

- 케리 이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던지려 했던 단죄의 돌들을 내려놓으면 소중한 사랑의 사람이 보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이며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배반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죄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더 잔인하고 더 무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와 용서를 다시 땅에서 시작하십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만납니다. 단죄의 돌들을 내려놓아야 할 이유를 만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으로 사랑의 글을 쓰십니다. 버려질 수 없는 사람이며 용서의 가치입니다. 용서의 반성문을 쓰는 사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우리들을 향해 오히려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단죄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단죄를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고귀함을 되찾아 줄 뿐입니다. 갈 곳이 없던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용서 가장 좋은 소중함을 일깨워 주십니다. 단죄와 세상이 가르쳐준 판단을 내려놓으신 소중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사순은 소중함의 사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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