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16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16.
반응형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저승의 올가미가 나를 휘감았네. 곤경 중에 나 주님을 불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주님,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오니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소서.

2024년 3월 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16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예레 11,19)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요한 7,40-53
오늘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16일
유재현 다니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34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논란을 점진적 구조로 펼쳐 나갑니다. 전반부에서는 군중 사이, 후반부에서는 권력가들 사이의 논쟁이 나옵니다. 사회의 하층부부터 상층부까지 예수님에 대한 논란이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위험한 인물로 여깁니다. 결국 ‘위험인물’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까지 보내지만 그분을 체포하지는 못합니다. 

경비병들조차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연행을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도층은 ‘율법’을 근거로 그들을 비난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신망받는 율법 학자였던 니코데모가 “우리 율법에는”이라는 전제를 달며, 율법에 근거하여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심판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이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수선한 불안과 부당한 적대감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논쟁과 격분과 폭력에 침묵하실 뿐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리는 자세로 계십니다. 

사람들은 논쟁하고 술렁이며 요동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한 침묵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존엄, 전전긍긍하지 않는 태도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그 거리만큼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결정은 하되 단정하지않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재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과 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도 샤넬 복장이 현대 여성복의 시초였다는 것, 그리고 샤넬 복장을 착용한 여성이 스타일과 분위기 등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뿌려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샤넬의 패션과 향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창시자 코코 샤넬은 고령에도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은 떨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힘들어했습니다. 
 
1971년 1월의 어느 주일, 그녀는 리치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곱게 차려입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녀 곁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런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 당신이 날 죽이고 있어요.” 
 
“당신은 날 죽이려 하시는군요!” 
 
그리고 87세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코코 샤넬의 말대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는 늙어서는 안 되고,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과정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그분 뜻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워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연결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 C.조이벨 C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이제는 있는 곳이 됩니다. 바라볼수록 놀라운 신비일 뿐입니다. 예언은 신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만든 교만한 선입견에는 축복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의 계획을. 선입견을 허무시며 갈릴래아를 선택하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쓸데없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 노력합니다. 버려지는 갈릴래아가 아니라 살리는 갈릴래아입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가는 사람의 시각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맡겨두어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는 막을 순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선입견을 사랑으로 다시 보게 하십니다. 감춰진 사랑 감춰진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사랑의 여정입니다. 선입견에서 빠져나와야 다시 보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