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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0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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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의 설교로 많은 백성들을 부르셨으니 모든 신자들이 그 선교 열정으로 불타올라 거룩한 교회가 세상 어디서나 새로운 자녀들을 많이 얻어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25,6-10ㄱ)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5,29-3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이사 25,6-10ㄱ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그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신다.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5,29-37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3일
장세훈 시몬 신부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개 00:08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1:41

✚ 미사시작 02:00

✚ 강론시작 09:0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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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메시아의 손길은 연민에서 시작된다.

“산 위에 머무르[시는]” “주님의 손”(이사 25,10)이 모든 민족들에게 잔치를 마련하시고 그들에게서 고통의 너울과 덮개를 벗기시며 모든 이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희망의 절정이 됩니다.

이 희망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실현됩니다. 산 위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다가오는 군중이 겪는 온갖 형태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메시아께서 오셨음을 알리는 분명한 표지입니다(마태 11,4-5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구받으시지 않은 것까지 베풀어 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굶주린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에서, 곧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라틴 말에서 연민은 다른 이의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을 뜻합니다. 전쟁, 기아, 재해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소식에 연민을 느낍니까? 나와는 관계없는 ‘그들’의 일로 여깁니까?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다가가서 함께하나요, 아니면 피하나요?

제자들이 가진 적은 양의 음식(빵 일곱 개와 물고기 조금)이 ‘주님의 손’에 들리자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습니다. 군중을 먹일 생각을 하지 못하였던 제자들은 주님의 손을 거쳐 나온 음식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이 신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빵과 물고기를 만들어 내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실제로 가진 것에서 출발하십니다.

연민과 나눔, 이 두 가지는 어려움을 겪는 이웃 안에서 메시아의 현존을 드러내 줍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손’을 쓰시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잔치를 산 위에 차리는 까닭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주님의 잔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상 잔치와는 다른 주님의 잔치라는 걸 얘기합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는 차별 없이 모두가 초대되는 잔치입니다.

이사야서는 모든 민족을 위해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신다고 얘기하고, 복음에서는 다리 절고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과 그 밖의 다른 불구자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와도 주님께서 내치지 않으시기에 모두 함께하는 잔치입니다.

그렇겠지요. 당신 잔치의 초대에 어떠한 차별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차별 면에서 차별이 없다면 그런 분은 주님도 아니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런 분이 무슨 주님이고 그런 분을 우리가 우리 주님으로 섬길 필요 있겠습니까? 그런 분이라면 나도 차별당하고 초대받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주님께서 차별 없이 모두 초대하신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당연히 그럴 거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잔치는 주님만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도 서로 차별하지 않는 잔치이고, 나만 초대받길 원하지 않고 같이 가야만 갈 수 있는 잔치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저 절름발이하고는 같이 못 가겠다고 하거나 저 눈먼 사람이나 말 못하는 사람과는 같이 못 가겠다고 하면 입장이 아예 거부되는 잔치입니다.

제가 매년 뙤약볕에 포르치운쿨라 도보 순례를 하면 제일 못 걷는 사람을 맨 앞에 세우고 걷는데 성질 급하거나 더위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앞질러서 빨리 가려고 하는데 이것처럼 초대받아 갈 때 같이 가는 것이 힘들다고 같이 가지 못하고 혼자 가려고 하면 거부되는 잔치입니다.

주님의 잔치가 세상 잔치와 세 번째로 다른 점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더 가고 싶어 하고 비장애인보다는 장애인들이 더 가고 싶어 하는 잔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잔치가 주님의 잔치라는 말입니다.

사실 세상 잔치에 귀빈으로 초대되고 거기서 맛있는 것 실컷 먹는 자는 주님께서 당신 잔치에 귀빈으로 초대해도 거기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잔치가 산 위에 차려지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를 초대하면서 왜 산 위에 잔치를 차리십니까? 산 위에 잔치가 차려지면 다리 저는 이와 눈먼 이가 가기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 산 위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와 필요가 있는 사람, 그 산 위에 오르고픈 열망이 있는 사람만이 그 힘든 산을 오를 것입니다. 배부른 사람은 그렇게 힘들게 산 위 잔칫상에 갈 마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배고픈 사람이 천상 잔치에 가고픈 열망이 크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이 주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시고, 산 위에서 잔치를 차리고 초대하신다고 얘기하는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상에서 배고픈 사람과 그들과 함께하려는 사랑 많은 사람만 산 위에서 차려지는 주님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다.

“대림시기”는 자신의 ‘간절한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간절한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 곧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참조).

이들은 자신의 갈망을 품고, 더러는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께 다가왔지만,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눈 먼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은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마태 15,34)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빵 “일곱 개”는 완전함의 숫자요, 거기에 더하여 ‘물고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찰”(마태 15,37) 정도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알고’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 곧 “참된 빵”이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이미 찾은’, ‘이미 와 있는’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5,32
저 군중이 가엽구나.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니 
제 속 깊이 새겨주신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 주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시고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은총을 원한다면, 주님께 당신을 ‘공들일 시간’을 드리십시오.

미하엘 엔데의 명작 소설 『모모』에는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가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시가를 피우며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속삭입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멍하니 있는 시간, 부모님을 돌보는 시간,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을 줄여 시간저축은행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부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속아 미친 듯이 바쁘게 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부자는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회색빛으로 변해갑니다. 삭막하고, 짜증이 늘고, 눈빛은 죽어갑니다. 시간을 아꼈는데, 정작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고아 소녀 모모는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뿐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시계를 보지 않고 하염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러 주는(Stay)' 그 시간 속에서, 다투던 사람들은 화해하고, 지친 사람들은 용기를 얻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바쁜 효율성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모처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낭비하는 시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모두 회색 신사들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숏폼(Short-form) 영상의 15초도 지루해서 넘겨버리는 '초가속의 시대'입니다. 뇌는 끊임없는 자극에 중독되어, 잠시도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도파민 디톡스'나 '멍때리기 대회', 심지어 돈을 내고 독방에 갇히는 '감옥 호텔'과 '템플 스테이'가 유행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 돈을 내고 자신을 가두어야 하다니요. 이것은 우리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제발 좀 멈춰라, 비우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의 장면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군중들은 광야에서 무려 '사흘'을 머물렀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푹 잠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배고픔보다 영혼의 허기가 더 컸기에, 예수님 곁에 머무는 그 시간을 낭비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태 15,32)

여기서 "가엾다(Splanchnizomai)"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애끓는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지나가는 구경꾼이 아니라, 당신 곁에 머물며 시간을 내어드린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바친 '사흘'이라는 시간의 열매였습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 하권에는 이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는 예화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빚더미에 앉은 한 과부가 엘리사 예언자에게 호소합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묻습니다. "집에 무엇이 있느냐?" "기름 한 병뿐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묘한 지시를 내립니다.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 오시오. 조금 빌리지 말고 되도록 많이 빌려 오시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빈 그릇들에 기름을 부으시오."(2열왕 4,3-4)

여인이 빈 그릇을 빌려와 기름을 붓자, 작은 병에서 기름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모든 그릇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그릇을 더 가져오너라"고 했을 때 아들이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 순간 기름은 멈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기름)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담을 우리의 '빈 그릇(시간/공간)'이 없으면 흐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빠서 마음의 빈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주실 수가 없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내어드릴 '빈 시간'이 없어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신비는 역설적입니다. 채우려고 애쓰면 비게 되고, 비우려고 애쓰면 채워집니다.

우리가 나를 고독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친구'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침묵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단식(배고픔)으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영원한 '양식'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철저한 무(Nothing)로 내어드릴 때, 그분은 나의 전부(Everything)가 되어 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오실 자리를 마련해드리고 싶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가꾸시고 공들일 수 있는 '시간의 빈 그릇'을 마련해드려야 합니다. 꽉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이 비밀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낭비한) 그 시간 때문이야."

우리가 성체 조배실에 앉아 있는 시간, 묵주기도를 바치는 그 시간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낭비입니다. 생산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빈 시간'을 주님께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시간에 우리 영혼의 밭을 가꾸십니다.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며, 우리를 당신의 '소중한 장미'로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때, 주님께서는 그 시간을 재료 삼아 여러분의 인생을 기적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밥보다 말씀이 고파 사흘을 견딘 군중처럼, 우리도 주님 곁에 빈 마음으로 머무릅시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굶겨서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빵을 많게 하셨다.

‘곰표’라는 브랜드를 들으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연세가 있는 분들은 대부분 ‘밀가루’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맥주’를 떠올립니다. 
 
사실 곰표 밀가루는 1952년부터 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브랜드 노후화에 빠지게 됩니다. 특별히 관심 가는 브랜드도 아니고, 그저 올드한 밀가루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밀가루를 사다가 직접 반죽하지 않아도,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로 데우기만 하면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냉동식품이 있지 않습니까? 
 
이 ‘곰표’에 다시 신선함을 불어넣은 계기가 바로 곰표 밀맥주였습니다. 이로 전 세계 맥주 브랜드가 경쟁하는 편의점 맥주 시장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기업에서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면 큰일 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경험해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발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새로운 일에 함께할 수가 없게 됩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방법은 나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 곁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자기들만이 구원의 선물을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구원될 수 없고, 더군다나 죄의 결과라고 생각해서 병자들 역시 구원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에 그 누구도 제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군중이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보고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마치 3자가 부르는 듯한 호칭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 하느님’, ‘주님’ 등의 호칭을 썼을 것입니다. 즉, 여기의 군중은 대부분 이방인이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유다인도 아니면서, 사흘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머물러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 곁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께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쫓아내지 않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구원은 이방인이나 병자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또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의 것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풍요로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살지 않게 하라(랠프 월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내어놓는 여기에서 진정한 나눔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감사하고 나누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배부르게 됩니다. 우리가 나눌 때, 부족함은 사라지고 모두가 배부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어놓음 속에서 빚어지는 은총입니다. 은총은 적당함이 아니라 넘쳐나는 본질입니다. 

기적은 어느 누구의 독점이 아니라 나눔의 식탁에서 탄생 되는 함께의 체험입니다. 진정한 삶은 깨달음이 목적이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빵을 나누는 나눔의 행위 속에서 완성됩니다. 배고픔이라는 현실 앞에서 힘의 논리나 경쟁의 원리는 사라지고 부드러운 나눔의 손길이 군중 전체를 살렸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뀌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충만함은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평화는 말이 아니라 다 함께 배부른 사랑의 식탁에서 실현됩니다. 탐욕 없이 나누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한 조각의 빵이 모두의 배를 채우듯, 작은 나눔 속에 사랑이 흐르고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손길이 누군가의 굶주림을 채우는 나눔이 이루어지는 순간, 하느님의 은총은 이미 여기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마태오복음 15장 32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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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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