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주 하느님, 저희의 간청을 자비로이 들으시어 시련을 겪는 저희를 인자로이 도와주시고 이 세상에 오시는 성자께 힘을 얻어 다시는 옛 악습에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11,1-10)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 오늘 복음
(루카 10,21-24)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이사 11,1-10
오늘 제1독서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루카 10,21-24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2일
전병권 보나벤투라 신부
✚ 교황님 12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41
✚ 강론시작 08:0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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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마음을 비울 때 보이는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아버지를 찬미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친교 안에서 기쁨에 가득 차 계십니다. 우리는 대체로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쁨이, 성령 안의 기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시는 까닭은 당신의 진리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기]”(루카 10,21)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부지들”로 옮겨진 말은 그리스 말로 ‘아기들’을 뜻하며 흔히 ‘작은 이들’로 옮겨집니다. 이 표현은 겸손하고 단순하며 신뢰에 찬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계시는 바로 이 작은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작은 이의 길은 늘 겸손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작은 이는 자기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삶과 생각의 중심에 자신을 두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선택하신 이들은 바로 이 ‘작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
대림 시기는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그 하느님을 마음 안에 온전히 모셔 들일 때,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이(이사 11,1 참조) 주는 기쁨과 평화는, 구세주께서 가져오실 가슴 벅찬 기쁨과 평화의 예언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령으로 꿰뚫어보고 내다보는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시어 성령으로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롭게 하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가 예언한 메시아가 오셨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분이시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라고 얘기하면서 아울러 그것을 보는 눈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얘기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언젠가 저는 우울하다는 것은 무신론적이라고,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그 안에 아니 계신다는 표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와 복음의 빛을 받아 바꿔 얘기하면 그 안에 성령께서 머무시어 성령 충만한 사람은 우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정신질환자를 우울 마귀 든 사람이라고 잘못 진단하곤 악령을 쫓아내는 행위를 하다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들과 같은 뜻도 아니고 같은 행위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우울감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면 그것을 심리학적으로도 봐야 하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울 마귀 짓이라고 경계하며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 계시면 우울 마귀가 우리 안에서 준동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우울 마귀는 꼭 악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우울케 하는 모든 악한 세력과 기운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성령을 모셔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신앙적인 관점이란 성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눈으로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움과 기쁨을 꿰뚫어 볼 줄 알고, 성령의 눈으로 우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희망을 내다볼 줄 아는 것입니다. 고통도 꿰뚫으면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울해도 내다보면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 안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뛰니.”(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비록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뜻의 선하심’에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전부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는 이라야 알아듣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21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당신의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선하신 그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법: 네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아버지 손을 잡아라.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 세상과 단절된 채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녀의 가정교사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손바닥에 글씨를 썼습니다. 인형을 주며 'D-O-L-L'이라고 썼지만, 헬렌에게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손가락장난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을 데리고 펌프가로 갔습니다. 선생님은 펌프질을 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헬렌의 한 손에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물의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다른 한 손바닥에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썼습니다. 'W-A-T-E-R' (물)
바로 그 순간, 헬렌의 영혼에 번개 같은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생생한 단어가 내 영혼을 깨웠다. 그것은 빛과 희망과 기쁨을 주었고, 나를 자유롭게 했다."
헬렌이 언어를 깨우친 것은 머리로 고민하며 땅을 팔 때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의 인도하심(손)과 위에서 쏟아지는 물(은총)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참된 앎은 내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빛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루카 10,21)라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공부'해서 얻는 지식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논리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체험되는 분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무신론적 지식인 형 이반과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가 등장합니다. 이반은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논리정연하게 나열하며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그의 논리는 너무나 완벽해서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악마이거나 무능한 거야." 이 차가운 지성의 공격 앞에서 동생 알료샤는 말문이 막힙니다. 그는 논쟁으로 형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형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 단순한 사랑의 행위, 논리가 아닌 온기(입맞춤)가 닿는 순간, 이반의 견고했던 무신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논쟁이 아니라 입맞춤으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내가 운전대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비게이션을 끄고,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느님은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농사는 내 땀과 노력으로 땅을 파서 소출을 얻는 행위입니다. 대신 하느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면에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안해서(내비게이션) 몰래 많이 거두어 저장하려 했지만, 그것은 다 썩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농부'가 아니라, 매일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줍는 '거룩한 거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파는 것을 멈출 때, 하늘의 양식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 지식의 기쁨은 겸손하게 부여받는 것이지, 굴을 파듯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영적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 곡예사』 이야기에서 공중그네의 비밀을 말합니다. 공중그네에는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플라이어(Flyer)'와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가 있습니다. 곡예사는 말합니다.
"플라이어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공중에서 제가 맞은편 봉이나 캐처를 잡으려고 팔을 뻗어 발버둥 치면, 둘 다 손목이 부러져 떨어져 죽습니다. 제 할 일은 그저 팔을 뻗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력한 캐처가 내 손목을 정확히 낚아챕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공중그네에서 내가 행복을, 내가 구원을 잡으려고(Digging) 아등바등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공중에서 힘을 빼고, 위대하신 캐처(하느님)가 나를 잡아주실 때까지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 하면 추락하고, 잡히기를 원하면 비상합니다. 이 모습이 철부지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 위한 모습입니다. 작아집시다. 그러면 잡아주실 것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오랫동안 특수 사목을 하던 신부가 정말 오랜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회사원처럼 사무 업무만 하다가 드디어 사목자가 된 것 같다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당의 사무적인 일들은 전문가처럼 처리할 수 있었지만, 강론하는 것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거의 20년 가까이 강론을 하지 않았었기에 신자들이 원하는 강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강론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혀 반응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고, 또 원하는 강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이 신부는 어떨까요? 누구보다 기쁘게 본당 신부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니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고, 따라서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전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만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발전할 수 없습니다. 불평불만 등의 부정적 마음으로 후퇴하는 자기를 만들게 될 뿐입니다.
남보다 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문제점은 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의 안테나를 세워야 합니다. 겸손해야 자기 문제점을 알고 또 해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많은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직후에 이어지는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0,21)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당대의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스스로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과 교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배움이 짧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겸손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이루려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되려면,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가 되려는 마음보다는 철부지들처럼 하느님 말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기도 내용이 될 만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의 명언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파울로 코엘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가장 맑고 참된 지혜는 철부지의 마음에 깃듭니다. 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문입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길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 것이 깊다고 하늘 나라를 더 빨리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이들과 겸손한 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철부지의 마음은 욕망과 계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큽니다. 꾸미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억지로 부여잡지도 않습니다. 이 대림 시기는 세속적 지혜를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드러낸 철부지 같은 정직함이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추고 단순해지면 감사와 은총의 길이 열립니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은 교만과 지식의 많음이 아니라, 우리의 낮고 비워진 마음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오늘의 삶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신비는 지식이나 계산이 아닌,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드러나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루카복음 10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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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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