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6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25,13ㄴ-21)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사도 25,13ㄴ-21
오늘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요한 21,15-19
오늘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6일
강언덕 베네딕토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0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이 아름다운 대화는 교회에서 하느님 백성을 돌볼 직무와 권한을 받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하는 본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편 교회의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화에서 되풀이되는 표현들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대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드러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사랑합니다.’라는 답변,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당부가 세 번씩 되풀이됩니다(요한 21,15-17).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한 잘못을 기워 갚고 사랑을 회복하도록 세 번 당신께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 말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때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뜻하는 낱말을 쓰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좋아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아직 당신과 같은 사랑에 미치지 못함을 아시고 세 번째는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좋아하는 마음을 뜻하는 낱말로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이렇게 불완전함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어 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참된 사랑은 공동체를 돌보는 실천으로 드러나고, 베드로는 주님의 자비와 신뢰에 의지하여 양들을 ‘돌보며’ 응답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직무를 맡는 데에는 관리 능력이나 재능보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시고 나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21,19). 이제 그는 착한 목자의 삶과 죽음을 본받는 길로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도 삶에서 여러 차례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응답이 점점 더 진실해지기를 바라면서 충실히 주님을 따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질문 받고 도전 받는 우리
요한복음의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는데 세 번이나 하십니다. 세 번 배반했기에 그리 질문하시는 것인데 이런 질문은 실로 고약한 질문이 아닙니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고문이라고 함이 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왜 이런 고약한 질문을 하실까요? 진정 고약한 질문이고 베드로를 곤란케 하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부부 사이처럼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걸까요?
주님은 우리 인간과 같진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질문의 첫 번째 뜻은 사랑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지 질문하시지만 실은 당신의 사랑 고백입니다. 질문하시는 것은 배반한 그일지라도 그 사랑을 여전히 받길 원하시는 것이고, 사랑을 받길 원하신다는 것은 배반했을지라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은 원치 않고 원치 않고 거절하는데도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은 스토킹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것은 너는 배반했어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주님께서 당신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베드로를 용서하시며 다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질문의 두 번째 뜻은 당신 양 떼를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세상을 떠나 여러분의 자녀가 버려지게 된다면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보다 가난한 여러분의 오랜 친구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사랑을 확인하고 당신 양 떼를 맡기신다는 것은 한때 배반했더라도 베드로의 사랑을 믿는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나의 사랑이 믿을 만하지 못하기에 여간해서 너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한 번 배반한 적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의 사랑을 믿지 못하지요. 이것이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의 차이인데 주님은 배반한 베드로를 다시 믿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실은 더 곤란한 질문을 베드로에게 하셨지요. 다른 제자들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셨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가 더 사랑하기를 바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욕심 때문에? 아니라고 우리는 역시 믿어야 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더 사랑하길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 더 큰 사랑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더 큰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더 큰 시련을 받을 것이고, 더 큰 시련을 받을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더 큰 사랑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의 모든 양을 책임질 대표 사도로서 더 큰 시련을 받을 것이고 더 큰 사랑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운명을 이렇게 예고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따르라는 첫 번째 명령에는 죽음이 두려워 따르는 데 실패했지만 이 두 번째 명령에는 실패하지 말고 따르라는 말씀이며 당신처럼 당신 양 떼를 끝까지 잘 돌보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우리 또한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질문받고, 어느 정도까지 책임과 시련을 받아들일지 도전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1,17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한 남자가 우거진 숲속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높이 뛰었지만, 구덩이 입구까지 다다를 수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 구덩이에서 나올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바닥 구석에 놓여 있는 삽이 보였습니다. 그는 삽으로 땅을 파서 흙을 구덩이 밖으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땅을 파다 보니 구덩이는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일까요?
지나가는 사람이 구덩이에서 흙이 던져지는 것을 보았고, 구덩이 안에 사람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무엇하냐고 묻자, 이 남자는 구덩이에 빠졌는데 다시 나오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행인은 이상해서, 그러면 왜 삽으로 구덩이를 더 깊이 파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제가 이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여기 구덩이 안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물론 흙을 밖으로 퍼내서 이를 본 행인에게 구출되기는 했지만, 소리쳐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각해서 정작 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럴 때가 정말로 많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골똘히 생각합니다. 생각만 하다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더 깊이 고민만 하다가 힘든 시간을 갖게 됩니다.
사랑 실천도 그러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주님의 명령이기에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 제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고,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를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이유를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나와 맞지 않아서, 나에게 상처를 줘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아서,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어서 등의 이유를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2지금 하는 그 일이 결국 너의 모든 것이 된다.” 이 말처럼,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여도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순간, 그것이 나만의 소중한 기회가 되어 삶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드라마 ‘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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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말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더욱 깊어집니다.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진정한 돌봄입니다. 여기에서 어린양은 연약하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지속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랑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연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삶으로 시작하여 삶으로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반드시 돌봄으로 이어지고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진실합니다. 사랑은 돌봄의 뿌리이고 돌봄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렇듯 사랑은 방향이고 돌봄은 방법입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인 돌봄이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 없는 돌봄은 의무감에 치우쳐 빨리 지칩니다. 사랑과 돌봄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는 돌봄의 날 되십시오. 사랑은 끝까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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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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