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이든 높은 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과 구원이 나타났다. 알렐루야.
하느님,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세례의 은총이 그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그들이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7,51─8,1ㄱ)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6,30-35)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사도 7,51─8,1ㄱ
오늘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그 무렵 스테파노가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말하였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52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8,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요한 6,30-35
오늘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6일
박찬홍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47
✚ 강론시작 08:38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구원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온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다른 표징을 더 요구합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내리게 하여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
모세가 하늘의 곳간을 털어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준 것이 아니라, 허기진 백성의 소리를 모세가 전하자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이지요.
모세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겸손하면서도 위대한 인물로서, 이집트에서 고된 종살이를 하던 백성을 사십 년에 걸쳐 약속의 땅으로 이끈 참지도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느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종 모세 또한 하느님을 가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문득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시라고 알려 주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영원하고 참된 구원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서운 교만을 두려워하는 우리
어제와 오늘 스테파노와 논쟁하는 백성의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수가 훨씬 많은데도 스테파노 하나에게 수세에 몰리고 있음과 스테파노는 자유로운데 그들은 왠지 억지스럽고 경직이 되어있음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이런 그들에 대해 스테파노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목이 뻣뻣하고 마음이 닫혀 있으며 귀를 막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목이 뻣뻣하여 고개를 숙일 수 없습니다. 조금도 고개를 숙일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한 세리와 달리 꼿꼿이 서서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똑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꼿꼿이 서 있는 그들이 사람들에게는 목이 뻣뻣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말 대로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이 사람들에게도 교만하기 마련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물론 하느님께도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귀를 막고 있고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테파노가 하늘이 열려 있고 거기 계신 예수님이 보인다고 할 때 그들이 하는 행동이 바로 그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테파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열려 있는 스테파노에 비해 그들은 닫혀 있습니다. 이것이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스테파노 말의 뜻입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있지 않고, 그래서 스테파노의 이 말을 부정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교만 때문에 성령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호랑이가 무섭지 않고 악령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게 하는 교만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무서운 교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우리, 이런 교만한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오늘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럽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거 되는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6,35
내가 생명의 빵이다.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가 나에게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가장 큰 표징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남겨놓는 가장 큰 표징이 성체성사임을 밝히십니다. 군중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모세의 기적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실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나를 내린 모세는 믿으면서도,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좀처럼 믿기 어려워하고 있어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를 영하면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이 표징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절대 불가능한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물을 마시게 된 것이 표징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지 않게 되었나요?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배고픔과 목마름이 육체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여전히 먹고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만 가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생존 욕구’입니다.
모든 죄는 이 생존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라고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바쳤다면 생명 나무를 먹음으로써 뱀이 자아내는 욕망들을 이겨내는 기적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18세기 말 가난한 항구 도시 더블린은 저임금 노동자들의 술집으로 가득했습니다. 마티 탈보트는 열두 살부터 선창(船倉)에서 일하며 받은 급료를 대부분 술집에 쏟아부었습니다. 스물여덟 살이 되던 1884년 어느 토요일, 주머니가 빈 그는 다시 빚을 내 술을 사려 했지만 친구들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한 채 거리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문득 어린 시절 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마티야, 너를 배부르게 할 술이 아니라 참된 빵이 있다.” 그 길로 그는 가까운 성당으로 달려가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저는 술 때문에 제 삶을 망쳤습니다. 오늘부터 3개월만 금주하도록 서약하겠습니다.”
사제는 조용히 미사 시간을 알려 주며 덧붙였습니다.
“매일 새벽 성체를 모셔라. 예수님께서 네 허기를 채워 주실 것이다.”
그날부터 마티는 새벽 5시 30분이면 길바닥에 꿇어앉아 성당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동안 술에 대한 갈증이 끓어오를 때면 그는 십자가를 꼭 움켜쥐고 중얼거렸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만 더 견디게 하소서.”
새벽 미사에서 성체를 모신 뒤 그는 폭풍이 잦아든 바다처럼 고요해졌습니다. 처음 서약했던 3개월이 지나자 그는 다시 6개월을, 1년을, 결국 평생을 주님께 약속했습니다. 그의 회개를 놀랍게 만든 것은 ‘채우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성체를 영한 날에는 중독의 공허함 대신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졌고, 남은 시간에는 일꾼 품삯을 모아 가난한 이웃과 해외 선교회에 익명으로 기부했습니다. 동료들이 알아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침상을 천 조각으로 덮어 매일 밤 회개와 보속의 사슬을 몸에 감고 있었습니다.
1925년 6월 7일 일요일, 마티는 평소처럼 성체를 모시기 위해 도미니코 수도회 성 사비오르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그랜비 레인 (Granby Lane)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습니다.
응급 도움을 받기 위해 외투를 벗겼을 때, 그의 허리에는 굵은 사슬이, 팔에는 작은 채찍 자국이 드러났습니다. 철야 성체조배와 보속으로 단련된 그 삶은 세상에는 감춰져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는 순금처럼 빛났습니다. 장례 미사에서 사제가 전했습니다.
“마티는 40년 동안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성체 안에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완전히 채웠고, 그 힘으로 자기를 이기는 은총이 무엇인지 증명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체를 통해 ‘생존 욕구’라는 깊은 허기를 치유 받은 한 평신도의 증언입니다. 세속·육신·마귀의 유혹이 가장 치열했던 자리에서, 그는 매일 미사 한 번으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성체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주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하신 약속이 실현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티 탈보트 가경자의 길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성체를 중심에 둔 ‘작은 충실함’이 40년을 관통하며 완성한 거룩한 여정이었습니다.이와 연계하여 수많은 사례들을 댈 수 있겠습니다.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신해 거의 2주 동안 굶김을 당해 죽으면서도 “그 사랑 영원하시다.”라는 시편구절로 주님을 찬미했던 말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그리고 첫영성체로 욕망에 목이 마른 알렉산드로의 칼에 수십 차례 꿰뚫리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며 죽어간 마리아 고레티 성녀들이 있겠습니다. 물론 이 기적들은 우리 주위에서도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에 대한 용서도 성체성사로 다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으라고 남겨놓으신 이 신비 안에서가 아니라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곧 삼위일체 하느님께로 향한 믿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성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믿음을 가지려면 삼구의 욕망을 이기려는 목적으로 성체성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 들어와서도, 물론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이 죄들 중에서 중대하다고 하는 죄를 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성체조배’입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는 성체조배를 통해 실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말하는 성체조배는 말씀 묵상과 함께합니다. 묵상으로 제 안에서 성체로 사시는 예수님을 저 자신이 믿음으로 깨워낼 때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한 이들은 모두, 말씀과 성체가 아니면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압니다. 이 때문에 성체성사에서 떠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쥐들의 싸움에 관한 실험이 생각납니다. 두 마리 쥐를 대결시키기에 앞서 한쪽에게만 소량의 진정제를 투여했습니다. 그 후 결과는 진정제를 먹지 않은 쥐의 승리였습니다. 진정제를 먹어서 흥분하지 않은 쥐는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정제를 먹이지 않은 새로운 쥐를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전 판에 승리했던 쥐가 너무 손쉽게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서 승리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 계발 강사들은 작은 승리라도 반복적으로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도 이런 말을 듣고 자기 자녀들이 이런 승리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승리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었습니다. 승리는 자신감을 오르게 하고, 행복 호르몬인 도파민이 오르게 하는데, 여기에 중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경쟁과 외적 보상을 주는 것에만 끌리게 되어서, 자기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그런 승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스포츠 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이 도박에 쉽게 빠지게 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네요.
승리가 반드시 좋을까요? 세상의 승리는 이렇게 불안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승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승리는 계속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중독성도 없으며, 진짜 행복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연 무엇을 좇아야 할까요?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께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믿게 하려면 표징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면 더 큰 것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중독성이 생겨서 진짜 하느님의 표징도 알아보지 못하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게 됩니다.
주님의 표징은 단 일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에서 그리고 매 순간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주님의 표징이었습니다. 특히 미사를 통해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빵을 주셨습니다. 이 빵을 모시는 사람은 하느님께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기에, 분명히 깜짝 놀랄 만한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어떤 표징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표징 안에 머물러도 감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을 통해 결코 배고프지, 또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는 주님 안에 언제나 머무는, 그래서 우리 역시 진정한 승리의 영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은 작은 노력이 반복되는 데서 온다(로버트 콜리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살아있는 사랑을 배우고 만나는 생명의 시간입니다. 생명의 빵은 생명의 물결로 오월을 물들입니다. 넘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빵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빵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우리 모두에게 주십니다.
생명이자 빵인 하느님의 조건 없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가장 좋으신 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하나가 되고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명의 빵보다 진실한 사랑은 없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늘도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받아 먹는 우리는 생명의 자녀들입니다. 생명의 날이며 감사의 날 되십시오.
요한복음 6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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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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