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5/0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5. 7.
반응형

 

 

저의 입은 당신 찬양으로 가득 찼나이다. 온종일 당신 영광을 찬미하나이다. 당신께 노래할 때, 제 입술에 기쁨이 넘치리이다. 알렐루야.

주님, 주님의 이 가족들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믿음의 은총을 주셨으니 저희가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원한 유산을 얻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5월 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7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8,1ㄴ-8)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6,35-40)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사도 8,1ㄴ-8
오늘 제1독서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6,35-40
오늘 복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7일
황준호 자선토마스 신부

 

✚ 미사시작 00:47

✚ 강론시작 06:5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시는 사람은 모두 당신께 올 것이며(6,37 참조)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6,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입교 예식을 시작하며 사제는 세례 받는 이와 다음의 문답을 주고받습니다.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 신앙이 그대에게 무엇을 줍니까?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이어서 사제는 다음과 같이 훈화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참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세례를 청하면서도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 못하였다면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어른 입교 예식』, 간략한 어른 입교 예식).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의 목마름과 허기짐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온 삶으로,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충만함과 행복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시간 안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생명의 빵’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공동체는?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공생관계라는 말이 있는데 공생은 좋은 의미이고 공생관계는 다 좋은가? 오월동주(吳越同舟)나 적대적 공생도 있고 각방 쓰는 부부의 공생도 있는데 공생관계는 다 좋은가? 이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공생에는 좋은 공생도 있지만 나쁜 공생 또는 그다지 좋지 않은 공생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주 금요일에 읽은 사도행전의 초기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좋고도 완벽한 공생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더 좋고도 완벽한 공동체는 오히려 오늘 사도행전에서 드러나는 공동체입니다.

그들만의 좋은 공동체 또는 그들끼리의 좋은 공동체는 좋은 공동체인지 모르지만 완벽한 공동체는 아니고 신앙적으로 보면 더더욱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간혹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참으로 훌륭한 친교를 나눕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들은 훌륭한 계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이 모일 때 하느님 얘기를 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데 자기들의 사랑과 친교가 자기들 밖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자기들끼리 깨 볶는 냄새가 나지만 복음 선포하지 않는 공동체는 하느님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고 이런 공생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같이 잘 살아도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오늘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오히려 복음적인 공동체입니다. 스테파노의 죽음과 박해로 예루살렘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생관계는 깨지고 공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이 은근히 암시하는 바이지만 이것이 전화위복이고, 여기에 하느님의 다목적이고 영적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흩어진 신자들이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갈등과 반목 끝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수들의 박해를 이용하여 신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들이 실은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이고, 박해도 박해가 아니라 복음을 더욱 치열하게 선포하게 하는 채찍입니다. 둘째로 박해자인 바오로가 복음 선포자가 되도록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박해하다가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지만 꿋꿋하고 복되게 순교한 스테파노와 신자들을 도구 삼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에서는 극과 극이 상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극과 극이 통합니다. 흩어진 것이 복음 선포의 기회가 되고, 박해자가 복음 선포자가 되는 것 같이.

오늘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가정 공동체이든 수도 공동체이든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얼마나 복음적인 공동체인지? 한마음 한뜻의 공생 공동체인지? 껍데기만 공생이고 제각각 살아가는 공동체는 아닌지? 공동생활도 잘하지 못하고 복음 선포도 하지 않는 공동체는 아닌지?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듣고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곧 당신 생명의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에 대한 신비, 곧 ‘말씀의 빵’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을 때, 신명기(8,3)의 말씀을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또 예언자 아모스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곧 당신 말씀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고 믿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곧 이 “빵”(말씀)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하십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곧 구원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빵을 먹는 일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역시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입니다. 곧 ‘믿음’으로 열리는 눈 말입니다. 그 눈은 바로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6,37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버지는 누구를 성체성사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도 역시 성체성사에 관한 복음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살아있는 빵이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신께 오는 이들을 당신이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선택하시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그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방박사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에게 별을 보내시어 당신 아드님께 이끄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드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동방박사들을 당신 아드님께 부르신 것일까요? 분명 구원될 이들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당신께로 이끄실 수가 없습니다. 아드님을 보내신 이유는 죽이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죽이려는 뜻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홀어머니가 어린 오누이(햇님과 달님)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이웃 마을 잔칫집에 일을 도와주러 갔다가 밤늦게 떡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넘을 때 무서운 호랑이(또는 늑대)가 나타나 어머니를 가로막았습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오누이에게 줄 떡을 아까워했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떡을 하나씩 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호랑이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타나 떡을 요구했고, 결국 떡이 다 떨어지자 어머니마저 잡아먹고 말았습니다.

호랑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의 옷을 입고 집으로 찾아가 오누이까지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호랑이는 걸걸한 목소리로 어머니인 척했지만, 오누이는 문틈으로 비친 호랑이의 모습을 보고 속임수를 알아챕니다. 겁에 질린 오누이는 뒷문으로 도망쳐 마당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습니다.

호랑이는 우물에 비친 오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무 위로 올라오려고 합니다. 오누이는 꾀를 내어 "참기름을 바르고 올라오라"고 거짓말을 했고, 미끄러운 나무를 오르지 못하던 호랑이는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위기에 처한 오누이는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살리시려거든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거든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튼튼한 금 동아줄(또는 새 동아줄)이 스르르 내려왔고, 오누이는 그 줄을 붙잡고 하늘로 무사히 올라갑니다.

이를 본 호랑이도 하늘에 똑같이 빌었습니다.

"하느님, 나도 불쌍하니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그러자 이번에는 썩은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욕심 많은 호랑이가 덥석 줄을 잡고 올라가다가 중간에 줄이 끊어져 땅에 떨어져 죽고 맙니다. (떨어진 곳이 수수밭이 되어 수숫대가 붉게 물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하늘로 올라간 오빠는 해님이 되고, 동생은 달님이 되어 세상을 비추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햇님과 달님’ 동화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동아줄입니다. 하느님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오누이에게는 그들도 잡아먹히지 않도록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노리는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을 내려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람을 살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뜻에 어긋나는 이를 당신 동아줄로 끌어올릴 수는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사람을 살리려는 좋은 마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을 보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치실까 봐 헤로데에게 가지 않고 그를 피해 돌아갑니다. 그전에도 헤로데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착한 사람들이였기에 다른 이들도 착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부르시는 이들은 ‘착한 뜻’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착한 뜻은 하느님처럼 생명을 살리려고 내 피를 쏟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착한 뜻은 나 자신의 근원적 결정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들입니다. 이는 부모나 환경의 교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착한 뜻이 어렸을 때 장착되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경쟁사회에서 착한 뜻을 갖기란 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 위주의 나라에서 착한 뜻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요? 착한 뜻을 심는 교육이 된다면 성체성사를 위해 많은 사람이 붐비게 될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이용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내어주어 생기는 친밀한 관계가 행복임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어렸을 때 부모가, 자라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러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변화된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죠?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행동하기는 정말로 힘들어요.” 
 
언젠가 어떤 분에게 들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는 것이 가장 힘들까요? 아니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힘들까요? 잘 생각해 보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은 계속 변하기 때문입니다. 10대의 ‘나’와 50대인 지금의 ‘나’는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포부터 시작해서 외모까지 1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정말로 많이 다릅니다. 심지어 성격까지도 많이 변했음을 깨닫습니다. 
 
몸 자체부터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변화는 불가능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변화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깨닫습니다. 변화되고 싶은 방향만 분명하면, 변화는 가능한 일이 됩니다. 
 
운동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종합검진에서 아주 안 좋은 결과를 받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하루에 만 보씩 걷기로 했습니다. 귀찮고 힘들었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꾸준히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건강을 찾을 수 있었고, 삶에 커다란 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더 대단하지 않을까요? 계속 변화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충분히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음을 믿으십시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이런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기 어렵다고 합니다. 믿어도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단순히 성당 나가는 것으로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길에서 모르는 누군가가 “이거 드세요.”라면서 포장도 없는 빵을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맛있게 드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여러분이 잘 아는 분이 주는 것이라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을 것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믿음을 성당 나가는 것에 한정 짓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주님을 알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알려는 노력을 통해 자기 안에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호레이쇼, 하늘과 땅에는 자네의 학문이 꿈도 꾸지 못할 사실이 수두룩하다네 (햄릿 1막 5장 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뜻을 세우고 뜻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따뜻한 실천은 우리의 따뜻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하늘의 뜻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은 나의 뜻을 내려놓을 때 더 깊어집니다. 뜻을 같이 하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뜻을 주십니다. 마음 없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뜻은 오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실천이며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며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뜻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그 자체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오늘 되십시오. 뜻이 귀해야 실천도 귀합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507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33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