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이 거룩한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뽑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주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해마다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을 기꺼이 지내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15,1-8)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6-14)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1코린 15,1-8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요한 14,6-14
오늘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6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3일
이상진 아모스 신부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9
✚ 강론시작 09:00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욥 19,25-26).
이는 까닭 모를 엄청난 재앙과 처참한 질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또한 그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의 구구한 억측에 시달리면서 욥이 토해 낸 말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희망과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렇듯 간장이 녹아내리도록 하느님 뵙기를 간절히 갈망해 왔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필립보 사도의 청원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야, ……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14,9).
예수님이 아니시면 그 누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표상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저 두려우신 분이 아니라 사랑이 지극하신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증거하는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이로써 알게 되는 엄청난 진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사람이 되시고, 또한 가여운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실 만큼 우리 하나하나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허무로 끝나는 덧없는 인생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사랑하신 ‘참으로 소중한 당신’, 사랑의 동반자들입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신비를 여러분은 믿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더 나무라시는 사랑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오늘 축일을 지내는 필립보는 주님과 오랫동안 지냈는데도 주님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필립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내야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인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정체에 관해서 더 잘 몰랐을 것이고, 필립보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과 함께 일찍부터 메시아를 기다려왔기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일찍부터 주님을 기다려왔고 더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주님은 유독 필립보에게 오랫동안 당신과 지냈으면서 아직도 당신을 모르느냐고 나무람 조의 추궁을 하실까요?
제 이해는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필립보를 나무란 것이 맞다면 다른 제자는 몰라도 너만은 나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나무라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큰 믿음과 기대의 표시일 것입니다. 사실 더 믿기에 더 큰 기대를 하고 더 많이 기대하며, 더 믿기에 더 나무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화가 나서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더 깨우치고 분발케 하려고 나무라신 것이라면 다른 제자보다 그것이 가능한 제자에게 나무라신 것입니다.
나무라봤자 소용없는 제자는 내 입만 더러워지기에 나무라지도 않잖아요?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깨우치기 위해서 사실 공을 많이 들이셨습니다.
어제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필립보를 꼬집어 시험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말하자면 주님께서 필립보를 시험에 들게 하신 것인데 다른 제자들을 놔두고 필립보에게 시험 문제를 내주신 것이 사랑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숙하다면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더 시험에 들게 하고, 더 시험 문제를 풀게 하신 것이 사랑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질문과 시험과 나무람 등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깨우치시고, 필립보도 이에 질세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림으로써 또 나무라심을 듣고 또 깨우치고 하면서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뵙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오금박듯 말씀하시지만, 필립보는 ‘아닙니다, 저는 아직 주님을 모르고, 아버지도 뵙지 못했습니다. 뵙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이 과정, 아버지를 뵙게 되는 이 과정을 필립보에게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진정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지금도 글씨체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마치 지렁이가 지나가는 것과 같았지요. 당시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께서는 성공하려면 글씨체가 좋아야 한다면서, 저를 비롯해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아이들 몇을 방과 후에 남겨서 또박또박 글을 쓰게 한 뒤에야 집에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뒤, 서예도 쓰면서 이제는 남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어렸을 때 글씨를 쓰는 것은 제게 커다란 스트레스였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말씀처럼 글씨체가 좋아야 성공할까요? 이제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글을 쓰고,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글 쓰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글씨를 잘 못 써도 상관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글씨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용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속마음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비치는 모습보다 이 세상을 힘차게 살게 해주는 마음의 내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많은 이가 겉모습만을 가꾸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SNS를 보면 대부분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힘든 것을 또 자기 어려운 것을 사진과 함께 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신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여행지에 가고, 멋진 공연 보는 것 등 자랑하고 싶은 것만을 올려놓습니다.
삶이 과연 이런 것일까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자기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내용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이 두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 모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요. 자기 눈으로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식의 말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마음으로 보고 하느님께 대한 깊은 내용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진실로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은 주님의 일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기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내용, 즉 주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은 결국 새로워지고 창조적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스티브 잡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뵙는 진실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다양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은총과 체험의 장(場)이기에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정된 시각을 내려놓게 됩니다. 사랑의 길과 사랑의 만남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드디어 말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도들이 됩니다.
삶을 직시하는 기본이 우리의 건강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면서 알게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먼저 다가 오시어 우리를 믿어주시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참된 우리 자신을 찾는 힘입니다. 그 좋으신 사랑 안에 살고 있고 영원히 그 사랑 안에 살고 싶습니다.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 청하는 오늘의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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